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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대비하지 않으면 위기의 계절 될 수 있어 예방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미래를 여는 조건이다. 자연재난부터 인파 사고까지, 그 대응의 열쇠는 '함께 대비하고 함께 실천하는 힘'에 있다. 제도는 정비되고, 기술은 진화하며, 시민은 참여하고 있다. 봄을 안전하게 피어내는 일은,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다음 사회'의 시작이다 송창영 광주대 방재안전학과 교수(한국재난안전기술원 이사장) 꽃이 피고 햇살이 따뜻해지는 봄. 사람들은 거리로 나서고, 전국 곳곳에서는 축제와 공연, 문화행사가 이어진다. 봄은 활력의 계절이자 공동체가 어우러지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 따뜻한 계절의 설렘 속에는 예기치 못한 위험도 함께 존재한다. 해마다 반복되는 안전사고는 우리에게 하나의 분명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봄은, 대비하지 않으면 위기의 계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올해 3월,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대형 산불은 이러한 경고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기온 상승, 건조한 날씨, 강풍이라는 조건이 겹치면 작은 불씨 하나도 통제불능의 재난으로 번질 수 있다. 특히 문화재 주변이나 관광지에서의 화재는 단순한 재산 피해를 넘어,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과 소중한 자산까지 앗아갈 수 있다. 봄철의 기후 특성과 환경 조건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 시기를 그저 따뜻한 계절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또한 봄은 야외 활동이 본격화되는 시기로, 각종 지역축제와 문화행사 등 대규모 인파가 모이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다중운집 장소에서는 예상치 못한 혼잡, 이동 동선 간섭, 응급상황 대응 지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견미지저(見微知著)", 즉 작은 징후에서 큰 위험을 미리 알아채는 지혜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안전은 일부 기관이나 특정 주체만의 책무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절실히 요구된다. 광주 북구 본촌동의 한 대형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북구청 공동주택과 직원들과 현장 관계자들이 굴착작업 공사에 대한 안전점검을 실시하고 있다. 2025.4.23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쯤에서 우리는 인류의 오래된 생존 전략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약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지구상에 공존하던 시기. 근육과 신체 조건만을 놓고 보면 네안데르탈인은 사피엔스보다 강하고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쪽은 사피엔스였다. 결정적인 차이는 '협업'에 있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언어와 신화를 통해 공동체적 신념과 규칙을 공유하며 혈연을 초월한 협력이 가능했고, 이것이 보다 큰 집단을 구성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반면 네안데르탈인은 가족 단위의 소집단 협력에 머물렀고, 그 확장성의 한계가 결국 생존력의 격차로 이어졌다. "네안데르탈인은 자기 근육을 믿고 싸웠고, 사피엔스는 서로를 믿고 함께 싸웠다"는 말이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이유다. 이제 우리는 그 협업의 지혜를 현대사회에 적용해야 한다. 봄철 재난과 안전 문제는 어느 한 주체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모두가 함께하는 협력적 대응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예방책이다. 중앙정부는 사전 위험요소에 대한 면밀한 점검과 함께, 지자체와 민간의 참여를 기반으로 하는 협업 체계를 점점 더 정교하게 다듬고 있다. 예컨대, 지역 축제나 공연과 같은 다중운집 행사의 경우, 주최자와 지자체, 경찰·소방 등 유관기관이 협력해 사전 안전점검을 실시하고, 인파 규모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한 혼잡도 예측 기술도 현장에 적용되며, 민간 자율방재단과 현장 요원이 주요 동선에 배치돼 즉각적인 상황 대응이 가능하도록 준비되고 있다. 산불 대응 역시 민관 협업의 대표 사례다. 국가유산보호구역과 관광지 인근 산림지역에는 드론과 CCTV를 활용한 감시체계가 촘촘히 구축되어 있으며, 화재 취약 시기에는 야외 불꽃 사용 제한, 입산 통제와 같은 조치가 민간단체와의 협력 하에 추진된다. 또한, 화재 발생 시 빠른 초동 대응을 위한 지역 단위의 훈련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야외무대, 천막, 전기설비 등 임시 구조물에 대한 점검도 빠질 수 없다. 행사 전 철저한 점검과 더불어, 주최자 대상의 안전관리 매뉴얼 배포, 강풍 등 기상특보 발효 시의 실시간 공유 체계 구축 등, 현장 실효성을 높이는 다양한 시스템이 운용되고 있다. 이러한 조치들은 단지 '행사 당일'의 안전만을 보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 내 안전 문화가 일상으로 정착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와 기술만으로는 완전한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안전은 현장을 구성하는 우리 모두의 태도에서 시작된다.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은 안내에 귀를 기울이고, 위험 요소를 발견했을 때는 주저하지 않고 알리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특히 가족 단위 관람객이 많은 봄철 행사에서는 보호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자녀와 함께 안전 수칙을 숙지하고 실천하는 일상적 태도는 다음 세대에게 '안전 문화'라는 중요한 유산을 전하는 일이기도 하다. 안전은 결국, 협업의 또 다른 이름이다. 우리가 서로를 배려하고, 함께 대비할 때 봄은 비로소 안전하게 피어난다. 예방은 거창한 시스템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오늘 이 순간, 우리의 작은 실천과 연대가 그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 힘은 언제나 우리 모두에게 있다. 2025.04.24 송창영 광주대 방재안전학과 교수(한국재난안전기술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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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연금개혁의 역사적 의미 이번 개혁은 단순 보험료 인상이 아니라, 기금이 고갈되기 전 구조개혁을 준비할 수 있는 전략적 시점에 이루어진 역사적 전환이었다. 더불어 모수개혁을 넘어 구조개혁 논의를 본격화하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번 개혁은 제도의 '완결'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연금을 향한 로드맵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석재은 한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2025년 봄, 지난했던 국민연금 개혁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 국민연금은 도입 이후 5년마다 재정계산을 통해 개혁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그때마다 논의는 반복적으로 유예되어 왔다. 이번 개혁은 통상 세 번째 개혁으로, 무려 18년 만의 결실이자 정치권의 역사적 결단을 통한 사회적 합의라는 점에서 분명 의미 있는 성과다. 이번 개혁안은 보험료율을 13%로, 소득대체율을 43%로 인상하는 모수개혁안이다. 이는 국민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부담을 높이는 동시에, 노후소득의 보장성을 일정 수준 강화한 정치적 절충안으로 평가된다.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분명 진일보한 개혁이지만, 기금고갈 시점을 8~15년 연장하는 수준에 머무른 점에서 여전히 불완전한 개혁이라는 한계도 있다. 그럼에도 이번 개혁은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당장 수년간은 적립기금을 헐어 쓰지 않고, 보험료 수입만으로 연금 지출을 충당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금의 운용수익이 재정의 한 축으로 온전히 유지될 수 있게 되었고, 기금운용수익이 훼손될 수 있던 위기국면에서 '급한 불'을 끄고, 보다 근본적인 구조개혁을 위한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이번 개혁은 제도의 '완결'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연금을 향한 로드맵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여야가 지난달 20일 국민연금 개혁안에 최종 합의했다. 사진은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서울북부지역본부. 2025.3.20.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개혁안에는 청년세대의 불안을 해소하고 제도에 대한 신뢰를 제고하기 위한 조치들도 포함되었다. 국민연금법 제3조의 2를 개정하여 국가의 연금지급 책임을 명문화하였고, 출산크레딧을 첫째아부터 12개월 인정하도록 확대하고, 군복무크레딧도 12개월로 확대하였다. 더불어 저소득자에 대한 보험료 지원 확대 등 청년층의 연금가입 기간을 보완하고 보장성을 높이기 위한 장치들이 마련되었다. 무엇보다 이번 개혁의 역사적 의미는 국민연금 도입 37년 만에 제도설계시 결정되었던 '3-6-9% 인상계획' 이후, 처음으로 보험료율 인상이 단행되었다는 데 있다. 1988년 3%로 시작한 보험료율은 1998년 9%까지 단계적으로 인상된 이후, 무려 27년간 동결되어 있었다. 이번 인상은 단순한 재정수지 보전 조치를 넘어, 연금재정의 운영방식을 준(準)적립방식(partially funded)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깊은 의의를 가진다. 전통적인 부과방식(pay-as-you-go) 연금은 일하는 세대가 은퇴 세대의 연금을 부담하는 구조로,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보험료 부담이 가파르게 증가한다. 실제로 많은 유럽 국가들이 적립기금 없이 이 구조를 유지하다가, 보험료율을 20% 이상으로 올리거나 대규모 국고를 투입해야 했다. 반면 적립방식(funded)은 세대 내부에서 자율적으로 부담과 급여를 조정할 수 있는 '셀프 부양'구조로, 고령화 충격에 보다 자유롭고 탄력적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는 나라다. 2050년에는 인구의 40%가 65세 이상이 되고, 2070년에는 생산연령인구 1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해야 하는 '울트라 고령사회'에 진입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연금재정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는 기술적 문제를 넘어, 세대 간 정의와 제도의 존속을 위한 핵심적 관건이 된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은 아직 기금이 존재하는 시점에서 선제적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다. 국민연금은 현재 1,200조 원 이상의 적립기금을 보유하고 있으며, 아직까지는 기금이 계속 쌓이고 있는 구간에 있다. 이번 보험료율 인상은 이 기금 누적 구간을 연장하여, 기금운용수익과 보험료수입이 재정의 양축으로 기능하는 '준 적립방식'의 연금 운영구조를 제도적으로 가능케 한 첫 걸음이었다. 즉, 9%에서 13%로의 보험료율 인상은 단지 기금고갈 시점을 미루는 조치가 아니라, 기금을 유지하고 운용수익을 확보함으로써 제도의 지속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높이려는 '철학적 전환'이라 볼 수 있다. 기금이 존재하는 한, 보험료 수입과 운용수익이라는 두 개의 재정 축이 작동하면서 노동인구 감소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생산인구 1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해야 하는 시대가 오더라도, 적립기금이 잘 운용된다면 청년세대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보험료 부담은 피할 수 있다. 실제로 제5차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는 이러한 가능성을 시뮬레이션으로 입증했다. 소득대체율 40% 기준으로 보험료율을 15%로 인상하고, 수급연령을 2048년까지 68세로 상향하며, 기금운용수익률을 5.5%로 유지할 경우, 70년간 기금 고갈 없이 지속 가능한 연금 모델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제시되었다. 현 개혁안이 적용한 소득대체율 43% 기준에서도 보험료율을 16.5%까지 점진적으로 인상하고, 자동조정장치를 도입하여 인구 및 경제 변동에 따른 미세조정을 시행하면, 수지균형보험료율인 21.2%보다 낮은 수준에서 준 적립방식 운영이 가능하다. 결국 이번 개혁은 단순한 4%포인트의 보험료 인상이 아니라, 기금이 고갈되기 전 구조개혁을 준비할 수 있는 전략적 시점에 이루어진 역사적 전환이었다. 한국은 연금의 위기시계가 본격화되기 전, 먼저 대응할 수 있는 소수의 나라 중 하나다. 이번 개혁은 미래세대를 위한 준비의 첫걸음이었다. 더불어 이번 개혁은 모수개혁을 넘어 구조개혁 논의를 본격화하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향후 개혁과정에서는 보험료율 추가 인상, 수급연령 상향, 자동조정장치 도입 등 지속가능성 제고를 위한 마스터플랜 수립이 필요하다. 보장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기초연금은 빈곤해소에 집중하고, 국민연금은 소득비례 연금으로 재편하며, 적용포괄성과 가입기간 확대, 퇴직연금의 내실화 등 다층 노후소득체계의 정비 방향도 함께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공적연금은 특정 세대의 이익을 위한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세대 간 신뢰를 지키고, 공동체 전체의 미래를 위한 사회적 기반 인프라다. 이번 개혁은 그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미래를 향한 첫걸음을 디딘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시도였다. 준적립방식과 기본보장의 방향을 따라, 우리 모두가 연금을 다시 성숙하게 논의해야 할 때다. 2025.04.17 석재은 한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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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읽기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자.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우리 모두가 자신만의 멋진 대답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신영철 정신건강정책 혁신위원회 위원장,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직장인을 대상으로 강연을 가면 처음 던지는 질문이다. "인사팀장입니다." 이런 대답을 들으면 아래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1969년, 아폴로 11호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에 착륙했다. 사람이 달에 간다고?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시절, 온 세상이 숨죽이며 그 역사적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이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이미 성공이 예정되어 있었다. 미국의 대통령이 우주선 발사를 준비중이던 NASA(미항공우주국)를 방문해서 직원들과 간담회를 가졌을 때의 일화. "당신은 이번 프로젝트에서 어떤 일을 담당했습니까?" 그 질문을 받은 사람이 안타깝게도 연구원이 아닌 NASA의 청소부였다. 그런데 그가 이런 대답을 한다. "저는 사람을 달에 보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청소부의 말에는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구성원 모두가 이런 마음으로 일한다면어찌 그 프로젝트가 실패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누가 감동을 위해 지어낸 이야기 일수도 있으리라. 그랬다 하더라도 밀려오는 감동의 실체는 '일'에 대한 개개인의 마음이 어떠냐는 것이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이제 우리 자신만의 멋진 스토리를 만들고, 누구도 할 수 없는 자신만의 멋진 대답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대구시티투어에 참여한 육군 50사단 장병들이 대구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앞산 전망대를 찾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2024.11.20.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올해 부쩍 군대에서 강연 의뢰가 많이 들어 온다. 많은 군인들이 마음에 큰 혼란과 불안 등을 안고 지내고 있다. 대부분의 군인들은 정치와는 무관하게, 그저 나라를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헌신하며 살아왔는데 본의 아니게 여론이나 대중의 목소리에상처를 입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 그래서 일선의 군인들이 상처를 치유하고 자부심을 자질 수 있게 힐링 강좌를 부탁해 온다. 예년 같았으면 안타깝지만 대부분 거절을 한다. 내가 기업에서 받는 강연료에 비하면 액수도 많지 않고 무엇보다도 군부대 방문을 위해 하루를 다 비워야 한다. 시간과 비용으로 보자면 나에게는 지극히 비효율적인 셈이다. 그런데도 올해는 벌써 몇 번이나 군부대 강연을 하고 왔다. 그들이 나를 초대하면서 보낸 메일에 간절함과 진정성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군 부대 강연의 시작은 역시 질문이다. "군인은 무엇을 먹고 사나요?" 이 질문은 무슨 뜻이며 어떤 의미일까? 이어지는 질문. "군인은 왜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뛰어 들지요? 소방관은 왜 죽을 각오를 하고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지요? 돈을 많이 주나요? 보상이 많아서인가요?" 그럴 리가 없다. 군인과 소방관이 힘든 일에 비해 보상이 적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또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한우가 맛이 있어요? 미국산 쇠고기가 맛이 있어요?" 이걸 뭐 질문이라고 하나. 당연히 한우지. "당신, 미국산 최고 등급 쇠고기 먹어본 적 없지요? 그러니 한우라고 하지" 모두들 웃는다. 최고급 쇠고기는 한우든 미국산이든 다 맛있다. 미군부대에서 먹어 본 스테이크가 그렇게 맛이 있다고 가 본 사람들 마다 입 소문을 내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소문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최고급 등급의 쇠고기를 우선 군대로 보내 군인들에게 보급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미군부대 스테이크가 그렇게 맛이 있다고?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세상이, 국가가, 국민들이 그들의 '가치'를 인정해 준다는 뜻이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직업 1위는 소방관이다. 선한 가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숭고함에 국민들이 존경을 표한다는 뜻이다. 군인들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국가와 사회는, 세상은, 국민들은 그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경의 예를 표한다. 이제 다시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자.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우리 모두가 자신만의 멋진 대답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신영철 정신건강정책 혁신위원회 위원장,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난 10여년간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며 직장인들의 정신건강 향상을 위해 노력해 왔다. 진료, 방송, 강연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2024년 대통령 직속 정신건강정책 혁신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민들의 정신건강 증진을 위해 노력 중이다. 2025.04.17 신영철 정신건강정책 혁신위원회 위원장,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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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돋보기 시(詩) 4편으로 풀어보는 한류의 세계 한류는 오늘도 만들어지고 전파되고 수용되고 있다. 창·제작자에게는 영감과 상상을, 플랫폼과 유통의 현장에는 전략과 방법론을, 연구자에게는 전망과 통찰을, 정책 담당자에게는 기획과 비전을, 그리고 수용자들에게는 향수(享受)와 감동을 주어야 할 그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정길화 동국대 한류융합학술원장 4편의 시(詩)로한류를 설명할 수 있다. 김춘수의 '꽃',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김용락의 'BTS에게', 그리고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이다. 이 네 편의 시로 우리는 한류의 과거, 현재, 미래를 헤아려볼 수 있다. 기승전결이다. 시와 함께하는 한류의 여정을 한번 떠나 보시겠습니까. ◆ 정의(定義)의 시작 김춘수의 '꽃': 이름을 부르는 순간, 한류는 실체가 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한류는 처음에 그저 '몸짓'이었다. 지나가는 바람처럼 보였다. 한국 드라마가 수출되고, K팝이 해외에서 열광하는 팬들을 만날 때까지만 해도, 그것은 하나의 '현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세계가 그것을 "한류(Hallyu)"라고 불렀을 때, 그 순간부터 한류는 실체가 되었다. 현상은 인식되고 하나의 용어로 명명됨으로써 실재(實在)한다. 아마도 1990년대 후반 중화권 매체에서의 '한류'라는 명명이 없었으면 드라마와 K팝 등 일련의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는 일과성의 유행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김춘수의 시처럼, "그를 불러줌으로써,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한류는 이제 더 이상 낯선 몸짓이 아니라, 세계가 이름을 짓고 불러준 하나의 '문화적 주체'가 되었다. 한류는 정의(definition)와 호명(呼名)으로써 시작되었다. 한류는 수동적인 소비물이 아니라, 세계가 함께 호흡하고 상호작용을 한 결과물이다. 학계에서 진단한 대로 한류는 전파(傳播)가 아니라 수용(受容)이다. '불리는 이름'이 있다는 것은 관계의 출발이다. 한류는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그 이름을 통해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김춘수의 시는 단순한 존재론을 넘어, 인식론적 선언이 된다. "당신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불렀기 때문이다." 한류는 그렇게 세계 속에 '들어왔다'. ◆ 생성의 시간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고통과 기다림 끝에 피어난 한 송이 한류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류는 하루아침에 피어난 꽃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분단과 동족상잔의 아픔, 절대빈곤에서 벗어나려는 산업화의 질주, 민주화의 함성, 다이나믹 코리아와 민주적 회복력 . 그 모든 역사적 울음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류가 가능했다. 소쩍새가 울었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다. 소쩍새 울음, 먹구름 속 천둥은 한국 현대사의 수난과 인고를 말하는 메타포다. 마침내 피어난 국화 한 송이는 응결된 문화적 승화로서 바로 한류다. '국화 옆에서'는 불가의 연기(緣起) 사상을 노래하는 시다. 그 어떤 생명도 혼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우주의 인연에 따른 것이다. 이처럼 한류는 단절된 흐름이 아니라 연속된 역사 속에 존재한다. 봄부터 울어온 소쩍새, 그 먹구름의 끝자락에서 한류는 피어났다. 설사 소쩍새와 먹구름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울거나 천둥을 치지 않았더라도 국화는 스스로 피어 그들에게 보란 듯이 현현(顯現)한다. 한류는 한국의 시간과 기억이 맺은 꽃이다. 그리고 이 '기억의 꽃'은 단지 아름답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증언이며, 시대의 결과다. 한류는 단순한 콘텐츠 상품이 아닌, 한국 사회가 겪은 모든 시련과 굴곡, 성공과 회복의 총체적이며 문화적인 결정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묻는다. 지금 피어난 국화, 한류는 과연 누구를 위해 피어난 것인가? 한국 사회 내부의 치유인가, 세계를 향한 몸짓인가? 아니면 그 둘 모두인가? 대구 달서구 이월드 83타워에 오픈한 이랜드뮤지엄의 뮤지컬 특별전시 '라라의 꿈의 극장'을 찾은 관람객이 제63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한국인 최초로 축하무대를 선보인 '방탄소년단(BTS)의 다이너마이트' 실제 공연의상을 살펴보고 있다. 2023.1.12.(ⓒ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공감의 울림 김용락의 'BTS에게': 언어를 넘어 마음을 두드리는 K-콘텐츠 "LOVE MYSELF, LOVE YOURSELF!/(...) /인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비로소 가슴이 뛰고 인간이 된다는 것을..." 김용락 시인은, 그의 작품 'BTS에게'에서 "LOVE MYSELF, LOVE YOURSELF!/이 말만은 알아듣겠더군 (...) 나는 그대들의 세계관을 이해하게 되었지/인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비로소 가슴이 뛰고 인간이 된다는 것을 문학이 가르쳐 주었지.."라고 진솔하게 토로한다. 그들이 왜 세계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는지 핵심을 통찰한다. BTS는 단순한 아이돌이 아니다. 그들은 언어를 초월한 감정의 번역자이며, 시대의 시인들이다. 그들의 노래는 말보다 앞서는 진심의 파동이다. BTS의 노래는 춤과 몸짓으로 쓰는 시다. 그들은 고백하고, 질문하고, 위로하고, 때론 저항한다. 한류의 힘은 여기에 있다. 잘 만들어진 문화상품 이전에 진심으로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서 시작된다. 팬덤은 단지 소비자가 아니다. 공감의 공동체이며, 문화의 공동 창작자다. '다른 언어로도 마음속을 두드리는' 콘텐츠. 그것이 바로 K-팝이, K-드라마가, K-콘텐츠가 세계를 울리는 이유다. 'BTS에게'는 이 점에서 시의 역할을 되새기게 한다. 시는 원래 개인의 고백이지만, 동시에 집단의 거울이 된다. K-콘텐츠는 세계를 감동시키는 이유로 '완성도'나 '스타일'을 들기도 하지만, 진짜 힘은 '진정성'이다. BTS는 자기 언어로, 자기 감정을 고백했기에 공감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류가 '세계의 감수성'과 접속하는 방식이다. 한류의 핵심 비결이다. ◆ 지속의 여정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 아직 쓰이지 않은 시, 아직 불리지 않은 노래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 한류는 지금도 여정(旅程)에 있다. 더 많은 서사, 더 깊은 공감, 더 다양한 목소리를 향해 나아간다. 히크메트가 말하듯, 진정한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이다. 그야말로 더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있다. 한류 또한 절정에 이르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한류에 자만하거나 자족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한류가 추구해야 할 미래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확장만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가치와 다문화적 포용, 인간성의 회복에 있다. 한류는 이제 그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문화산업과 콘텐츠 생태계의 선순환과 함께 문명사적 대안 역할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K-콘텐츠는 세계를 향해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한국 사회 안의 진실도 말해야 한다. 외연을 넓히되, 내면을 잊지 않아야 '진정한 여행'은 계속된다. 한류는 오늘도 만들어지고 전파되고 수용되고 있다. 드라마로 영화로 예능과 음악으로 그리고 웹툰과 게임으로. 그러나 그 쓰임이 '소모'가 아니라 '의미'가 되기 위해선 방향성이 필요하다. 창·제작자에게는 영감과 상상을, 플랫폼과 유통의 현장에는 전략과 방법론을, 연구자에게는 전망과 통찰을, 정책 담당자에게는 기획과 비전을, 그리고 수용자들에게는 향수(享受)와 감동을 주어야 할 그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정길화 동국대 한류융합학술원장, 전 한국국제문화교류원장MBC 교양PD로 '인간시대', 'PD수첩' 등의 프로그램 연출을 맡았다. '중남미 한류 팬덤 연구'로 언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MBC중남미지사장 겸 특파원을 거쳐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 한류융합학술원장으로 K-콘텐츠와 한류정책을 연구하면서 '공감 한류' 전파에 기여하고 있다. 2025.04.15 정길화 동국대 한류융합학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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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단상 돌다리 공무원이란 주민들이 상생할 수 있도록 돕는 '다리'인 것 같다. 사람들이 저 건너편으로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그래서 서로 만나 함께 돕고 살 수 있도록 제 등을 내어주는 다리. 튼튼한 두 '다리'로 우리 지역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뛰어나가고 싶다. 김윤서 충주시 주덕읍 행정복지센터 주무관 지난 4월 5일, 토요일은 국가공무원 공채 시험일이었다. 아침 일찍 관외 출장을 가야 하는 일이라 부담이 되어 올해는 지원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시험장의 풍경이 궁금했다. 점심을 먹으며 감독관에 지원했던 동료 주무관님께 응시생은 많았는지, 분위기는 어땠는지 여쭤보았더니, 한 교실에 스무 명 중 열아홉 명이 시험을 보러 왔다고 했다.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이 엄숙하고 진지했다고 했다. 주무관님의 이야기에서 자연스레 7년 전 봄을 떠올리게 되었다. 공무원 시험 준비생이었던 내가 갈 곳은 집과 독서실뿐이었다. 사람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미화(美化)된다고 하던데, 나는 여전히 그 시간을 어둡게 기억하고 있다. 출구가 없는 깜깜한 동굴 속, 벽에 손을 대고 더듬어 가며 한 걸음씩 걷는 듯했던 그때다. 그땐 합격만 하면 어떤 어려운 일이 주어지더라도 웃으면서 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어떤 민원인을 만나더라도 친절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해 운 좋게도 나는 두 번의 면접을 볼 수 있었다. 한 번은 경기도 고양에서, 또 한번은 충청북도 청주에서, 두 번 다 오후 조였다. 순번이 늦어 긴장 속에서 준비했던 답변을 되뇌며 긴 기다림을 견뎌야 했다. 손발은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졌지만 이미 다짐만으론 천생 공무원이었다. 어딘가 지친 표정의 면접관 두 분은 면접을 마무리하면서 나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할 기회를 주셨다. 그날 무슨 질문을 받았는지, 내 대답이 어땠는지는 다 기억할 수 없지만, 마지막 한마디만큼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이것만큼은 지킬 수 있을 거라고 너무 쉽게만 생각했던 다짐이기에. 7년이 지났다. '처음의 마음을 잊지 않는 공무원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호기롭게 말했던 공무원 시험 응시자는 지금 읍행정복지센터에서 증명서를 발급하고, 전입신고를 받는 민원 담당 공무원이 되었다.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도 의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무거운 말을 꺼낼 수 있었을까. 내가 했던 말이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 말인지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다소 뜬금없는 화제일지는 모르지만, 어느 날은 문득, 나만 이렇게 어려움을 느끼는 건지 궁금했다. 동기와 차를 마시면서 그 친구에게 슬쩍 물어봤다. "너는 왜 공무원이 되고 싶었어?" 들어온 시기는 다르지만 나보다는 초심이 남아있을 것 같은 남편에게도 물어봤다. "공무원으로 사는 지금의 삶이 어때?" 그들의 답변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삶에 있어서 각자의 가치관이 다르고 지향하는 목표 또한 다르기에. 하지만 신규 공무원이었던 시절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눈빛에서 어떤 반짝임을 볼 수 있었다. 모두 처음은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 읍행정복지센터의 일상은 분주하다. 많은 사람이 오고 간다. 그분들은 어느 날은 민원인이고, 어느 날은 직능단체 회원이기도 했다. 내게 오는 민원인들은 서류를 발급받거나, 전입신고를 하기 위해 오는 분들이다. 매일 같이 읍행정복지센터의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는 이상 스치듯 지나가는 민원인이 대부분이다. 한때는 아기의 출생신고를 받고 마음이 훈훈해지기도, 아기의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하며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다. 사망신고를 받으면 가족을 떠나보낸 이의 먹먹함과 슬픔이 그대로 전해지기도 했다. 길거리의 많은 사람들이 내게 들렀던 민원인 같았고, 마음속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언제 꾸었는지 모를 아득한 꿈속에서는 민원을 받고 사실조사를 나갔다. 내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그때를 기억하며 일에 대한 내 마음과 감정이 많이 무너져 있음을 느꼈다. 괴로운 마음과 무너진 감정은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곳에서 추스를 수 있었다. 산불 단계가 '심각'으로 격상됨에 따라 읍장님을 포함한 다섯 명의 직원들은 일요일에 산불 근무를 서야 했다. 팀장님 두 분과 함께 마을 순찰을 하며 위험한 상황은 없는지 확인하고, 주민들에게 산불 예방과 산불 발생 시 행동 요령에 대한 홍보지를 전달하기로 했다. 일에 대한 의식은 산불 예방을 목적으로 한 홍보 노래가 흘러나오는 행정 차량 포터에서 깨어났다. 부끄럽지만, 민원 업무의 성격상 출장 다닐 일이 많지 않아 마을 지리에 어두웠던 나는 그 마을이 그 마을처럼 보였지만 주덕읍 화곡리~사락리 일대, 덕련리~당우리 일대를 꼼꼼하게 눈에 담았다. 벚꽃이 아직 꽃망울을 터뜨리지 않아서인지 상춘객은 보이지 않았다. 한식을 맞아 공설묘지에 들른 성묘객에게 산불 예방 홍보지를 나눠드리며 조심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이번 산불은 국가적인 재난이다. 상황이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 있도록 작은 노력이나마 보태는 것이 공무원의 일임을 다시 느꼈다. 공설묘지 성묘객을 대상으로 산불 예방 홍보물을 나눠드리는 모습. 그날 오후에 곳곳에 내린 고마운 봄비처럼, 여러 유관기관에서 산불 피해 복구를 위한 성금 기부가 이어졌다. 동료 주무관님은 성금 접수로 바빠 보였다. 위로의 마음을 전하는 손길에서 우리가 살사는 곳이 서로 돕고 보듬는 지역사회임을 알았다. 그 안에서 공무원은 어떤 존재일까? 7년이 되어가는 시간 동안 이곳에 몸을 담으며 느꼈던 나의 짧은 생각으로는 공무원이란 주민들이 상생할 수 있도록 돕는 '다리'인 것 같다. 사람들이 저 건너편으로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그래서 서로 만나 함께 돕고 살 수 있도록 제 등을 내어주는 다리.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가장 강하고 튼튼한 돌다리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튼튼한 두 '다리'로 우리 지역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이번에는 벽을 더듬으며 한 걸음씩 느릿하게 걷지 않고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뛰어나가고 싶다. ◆ 김윤서 충주시 주덕읍 행정복지센터 주무관 충주시에서 민원담당으로 일하며 겪은 일상을 수필로 쓴 글이 등단의 영광으로 이어졌다. 공직 업무의 꽃인 '민원 업무'로 만난 수많은 일화들이 매일 성장통이자 글감으로 다가오고 있다. 내가 건넨 한마디가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업무에 임하고 있다. 2025.04.10 김윤서 충주시 주덕읍 행정복지센터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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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단상 집배원이 현금을 배달해드립니다 받는 이에게 마음을 전하기에도, 편리함을 드리기에도 충분한 '우체국 현금배달 서비스'. 다가오는 5월, 가정의 달에는 부모님께 계좌이체 대신 현금을 배달해 드려 보는 것은 어떨까. 숫자로 찍혀 있는 통장을 보는 것보다, 손으로 직접 받아보는 용돈은 좀 더 특별한 감동을 전해줄 것이다. 이재우 강원지방우정청 주무관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의 일이다. 주말부부로 지내던 우리에게 작은 위기가 찾아왔다. 월요일 아침에 바쁘게 집을 나선 남편이 지갑을 두고 간 것이다. 남편의 근무지는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우체국이었다. 남편이 근무지에 거의 도착할 무렵 지갑이 없는 것을 발견한 터라, 되돌아올 수는 없었다. 퇴근 후에 찾으러 오자니, 지갑 하나 찾자고 왕복 4시간을 움직이는 것은 가성비가 좋지 않았다. 택배로 보낼까 했지만, 신분증과 신용카드, 보안카드 등이 한꺼번에 들어 있던 터라 그 역시 꺼려졌다. 지금이야 핸드폰에 각종 결재 앱을 설치해서 사용하니 지갑쯤 며칠 없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결재 앱을 전혀 사용하지 않을 때였고, 지갑을 두고 간 남편은 그야말로 무일푼 신세가 되고 말았다. 순간 나의 눈앞에 돈이 없어 끼니를 거르며 주린 배를 움켜잡고 우편물 배달을 하고주변 직원들에게 멋쩍게 돈을 빌리러 다니는 남편의 모습이 그려졌다. 나는 평소 극단적인 상상을 잘하는 편이다. 안쓰러움이 밀려오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그때, 머릿속을 스치고 간 묘안이 있었다. '우체국 현금배달 서비스를 이용해서 현금을 보내주자.' 물론 '현금배달 서비스'도 집배원이 배달할 때, 수령인 본인이 맞는지 확인하기 때문에 신분증이 필요한 서비스이긴 하지만, 배달하는 집배원 본인에게 보내는 것이니, 신분증은 없어도 될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나는 서둘러 우체국 앱에 접속했다. 보내는 금액은 일십만 원, 그때 남기는 말에 적었던 글귀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긴급상황 발생. 긴급상황 발생. SOS를 칩니다. 신랑이 지갑을 두고 갔어요. 살려주세요" 당시 금융 창구에서 현금배달 서비스의 출납을 담당하던 직원이 평소 친하게 지내는 언니였기 때문에, 업무 처리를 하면서 한번 웃으시라고, 나름의 유머를 섞어 작성한 메모였다. 그날 오후, 현금과 메모를 전달받은 남편은 웃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고, 금융팀 언니도 무척 재미있어 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참고로 해당서비스는 당일 16시 30분까지 접수되는 건에 한해 접수신청 다음 영업일에 배달되며, 16시 30분 이후의 접수 건은 다음 영업일에 접수되는 건과 함께 처리되는 것이 원칙이다. 이때는 수신인이 집배원이었기 때문에 당일 전달을 받을 수 있었던 특이한 경우였다. '우체국 현금배달 서비스'는 신청인이 지정한 수신자에게 우체국 집배원이 직접 현금을 전달하는 서비스이다. 우정사업본부에서 제공한 우체국 현금배달 서비스 광고 이미지. 우정사업본부는 3월 12일, 경남 4개 지역(경남 산청·함양·거창·합천군)의 지방자치단체가 배부하는 지원금을 '현금배달 서비스'를 통해 전달한다고 밝혔다.(ⓒ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수신자에게 꼭 현금을 보내고 싶은 상황, 예컨대 계좌이체로 송금하는 것보다 좀 더 정성을 담고 싶을 때, 또는 받는 사람이 은행 창구를 방문하기 어려운 고령자나, 은행 점포가 드문 시외지역에 살고 있을 때 등의 상황에서 요긴하게 사용된다. '계좌이체로 송금하는 것보다, 좀 더 정성을 담고 싶을 때'라고 한다면, 바쁜 일정으로 경조사에 참석할 수 없는 경우가 가장 대표적이다. 아무리 모바일로 경조를 알리고 '마음 전하실 곳'으로 경조금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경조사를 참석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의 짐이 되곤 한다. 이럴 때는 계좌이체 대신 경조금과 경조 카드를 함께 배달하는 '경조금 배달 서비스'를 이용해서 마음을 전하곤 하는데, 배달 구분을 선택할 때 '증서배달' 대신 '현금배달'을 선택하면, 경조금을 현금으로 전할 수도 있어서, 경조사에 참석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표현할 수 있다. 연세가 많으셔서 은행까지 방문하기 어렵거나, 은행 점포가 드문 시외지역에 사는 부모님께 매월 '현금'으로 용돈을 드리고 싶을 때는 '부모님 용돈 배달서비스'를 이용하면 된다. 예전에는 부모님께 매월 용돈을 보내드리려면, 번번이 따로 신청을 해야 했다. 하지만 2018년부터 '부모님 용돈 배달서비스'가 시행되면서 한 번의 약정으로, 매월 예금주가 지정한 날짜에, 지정한 고객에게 현금을 배달할 수 있게 되어 서비스 이용이 훨씬 편리해졌다. 한편, '현금배달 서비스'는 복지정책에도 기여하고 있다. 우정사업본부는 지난달 12일, 경남 4개 지역(경남 산청·함양·거창·합천군)의 지방자치단체가 배부하는 지원금을 '현금배달 서비스'를 통해 전달한다고 밝혔는데, 이를 통해 금융기관이 멀어 계좌이체 된 지원금을 찾으러 가기 어려운 주민이나 거동이 어려운 고령자, 장애인 등 소외계층의 불편을 덜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받는 이에게 마음을 전하기에도, 편리함을 드리기에도 충분한 '우체국 현금배달 서비스'. 다가오는 5월, 가정의 달에는 부모님께 계좌이체 대신 현금을 배달해 드려 보는 것은 어떨까. 숫자로 찍혀 있는 통장을 보는 것보다, 손으로 직접 받아보는 용돈은 좀 더 특별한 감동을 전해줄 것이다. '우체국 용돈배달 서비스'가 안내된 홍보물(우정사업본부 제공) ◆ 이재우 강원지방우정청 주무관 강원지방우정청 회계정보과 소속으로 2022년 공직문학상 동화 부문 은상을 수상했다. 우체국 업무를 수행하면서 느낀 감정들을 동화로 옮겨내 수상의 기쁨을 얻었다. 우체통과 편지가 사라지고 있는 요즘이지만 여전히 우체국에는 온갖 이야기를 담은 우편물과 택배가 가득하다. 이들 속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동화로 옮기는 중이다. 2025.04.08 이재우 강원지방우정청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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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기행 '폭싹 속았수다!' 제주 용머리해안서 맛본 고사리해장국 오늘만큼은 고사리해장국으로백만 년을 관통한다. 자연도, 인간도, 이 감사한 음식을 맛 봬 준 식당 주인장도, 무엇보다 타향살이를 잘 견디고 언니의 제주 손발이 되어준 여동생도, 우리 모두 다들 "폭싹 속았수다."이윤희 방송작가, 로컬문화 전문가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인기가 사그라지지 않는 이 봄! 유채와 벚꽃이 절정인 제주에 가고 싶어, 또 엉덩이가 들썩인다. 봄처럼 싱그러웠다가 한여름같이 그늘 드리우며 푸르렀던 사람, 가을처럼 아름답다가 종래 겨울같이 포근했던 '애순'과 '관식'이 지금도 제주 바당에 있을 것 같아서 이번 제주를 향하는 하늘길은 왠지 더 꽁냥거렸다. 방송작가라는 직업 덕에 전국 어지간한 곳을 많이 다니긴 했지만, 제주만큼은 특별하다 못해 굉장히 비밀스럽도록 소중하다. 처음엔 이국적인 에메랄드빛 바다에 반했고 다음은 산인 듯 언덕인 듯 나지막한 '오름'에 반한 나는 아이가 어릴 때 제주서 한 달 살아보기도 했다. 오전엔 용눈이오름, 백약이오름, 금오름, 새별오름 등 오름을 전전하고 한낮에는 계곡서 발 담근 채 책 읽거나 곶자왈을 거닐고,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가 가신 오후에는 하도나 세화 바다에 몸 담그던, 조금 젊은 시절의 요망한 계집 '애순' 같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하지만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관광객들이 몰려들던 제주이건만 지금은 죄다 일본, 중국, 베트남 등 해외여행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빠지는 터라 제주 인기는 전만 같지 않다. 워낙 대표적인 국내 관광지라 높은 물가를 비롯해 몇 가지 발목을 잡는 이슈가 있긴 하지만 국내 여행 1번지 제주는 여전히 이름값을 하는 매력적인 땅이다. 특히 십 년 만에 다시 다녀온 '용머리해안'은 유일하게 로컬100에 이름올린 제주의 유산으로서 제주 여행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아직 제주 사람 중에도 그 가치를 몰라서, 혹은 시간이 맞지 않아서 가본 사람이 많다는 용머리해안. 무엇보다 바닷물이 빠지는 물때가 맞아야 하고 비바람이 거세면 출입이 금지되기에 매일 오전 9시부터 문을 여는 관광안내소에 입장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필수다. 미끄럽지 않은 편안한 신발을 신고 용머리해안으로 향한다. 용머리해안이 자리 잡은 서귀포시 안덕면에 이르기 전부터 저 멀리 시선을 사로잡는 커다란 돌덩이는 '산방산'이다. 용머리해안에서 본 산방산.(필자 제공) '산방산' 하면 설문대 할망이 한라산의 봉우리를 뽑아 던진 돌산으로 통한다. 실제 백록담 주변 둘레와 산방산 둘레가 비슷하다니 참으로 그럴싸한 이야기다. 그러나 신화는 그저 신화일 뿐. 우뚝 선 산방산은 한라산 이전에 생성됐다. 그리고 산방산과 한 묶음처럼 제주의 지질학적 특징을 보여주는 용머리해안은 한라산과 산방산보다, 그리고 무려 제주 본토가 생기기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화산체다. 명실상부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땅인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00만 년 전 얕은 바다에서 화산 폭발이 일어났다. 수성화산 분출은 단 한 번, 단기간에 끝나는 게 아니라 간헐적으로 여러 분화구에서 계속되었다. 화산 분출 도중에 화산재에 분화구가 막히면서 분화구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돼 각기 다른 3가지 방향으로 쌓여있는 화산재 지층을 볼 수 있는 곳이 용머리해안이다. 오랜 기간 파도에 쓸려 화산체가 깎여 나가고 다른 곳에서 수증기를 타고 날라 온 화산재가 다시 쌓이고 또 바다와 바람에 깎여나간 제주 최초의 땅이자 태곳적 땅 용머리해안. 제주 용머리해안.(필자 제공) 어딘들 마찬가지겠지만 용머리해안만큼은 사진이나 영상이 아니라 직접 봐야한다. 용암과 바다, 그리고 시간이 만들어낸 풍경에 압도당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검은 현무암과 옥색 바다가 기묘하게 얽히고설키는 곳에 서면 - 갖은 풍파 속에서 이 땅이 지켜온 100만 년 세월의 장엄한 무게가 그려진다. 작은 방처럼 움푹 들어간 굴방이나 드넓은 암벽의 침식 지대가 펼쳐져 장관을 연출하고, 오랜 세월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사암층과 파도가 만들어낸 해안 절벽을 시원하게 감상할 수 있다. 안덕면 사계리와 화순리 경계에 있는 용머리는 바위가 용의 머리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란다. 이 땅이 영험한지라, 제왕의 탄생을 우려한 진시황이 사자 고종달을 보내 이곳의 혈맥을 끊기를 명했다. 가히 산방산에 영기가 서려 있고, 산방산 남쪽 밑은 용이 날 자리가 틀림없다고 여긴 진시황제의 사자는 마침내 용의 허리와 꼬리를 끊었다. 그때 산방산이 몇 날 며칠에 걸쳐 소리를 지르며 울었고, 바위에서는 피가 흘렀다고 전해진다. 가까이 산방산을 마주한 용머리해안에 서 있노라니, 마치 산방산을 절규와 눈물을 밟고 선 양 오묘하다. 용의 피가 솟구쳐 만들었다는 그림 같은 기암절벽들을 시선을 사로잡는 가운데, 때로는 솟구치는 용암의 증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며 뻥뻥 구멍 뚫린 자국이며 시루떡같이 층층이 쌓인 지층 등 제주 최초의 속살을 만나는 환희가 있다. 바닷물이 철썩이는 곳에선 거북손과 갖은 어패류들이 단단히 발을 붙이고 있다. 제주 할망과 아낙들이 멍게며 해삼이며 좌판을 펴고 관광객들을 붙잡는다. 이 거대한 자연 앞에서 짧디짧은 인생은 그저 겸손해진다. 놀멍 쉴멍 걸으멍 - 더하여 쉴 새 없이 사진 찍으멍 걷다 보면 딱 한 시간이 걸리는 용머리해안 - 이 땅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은 두말할 것 없이 고사리해장국이다. 태초부터 화산의 땅이라는 숙명은 물과 곡식의 부족으로 가난이라는 단어를 이고 살았다. 이 땅에서 물이 많아야 하는 논농사는 어불성설. 오랫동안 제주를 먹여 살린 두 가지 작물은 고사리와 메밀이었다. 다년생 양치식물 고사리는 길고 튼튼한 뿌리로 화산암에서도 뿌리를 단단히 내렸고 빗물을 저장했다. 곶자왈에서도 한라산 표고 1000m 이상에서나 볼 수 있는 좀고사리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최북단 두만강이나 압록강에까지 서식하는 골고사리, 큰지네고사리 등 북방계 식물이 군락을 이룬다. 이 고사리가 제주 생태계의 시작이자 식재료의 시작이래도 과언이 아니다. 독성이 있지만, 우리 민족은 예부터 이 고사리를 삶은 뒤 말려서 독성과 쓰린 맛을 제거한 뒤 일 년 내내 즐겼다. 제사나 명절에도 고사리를 올렸다. 하물며 먹을 것 부족한 제주에서 고사리가 얼마나 귀한 식재료였는지 말해 무엇하리. "아직 길 잃음 사고 주의 안 뜬 것 보면 고사리 철은 조금 이른가봐." 제주가 좋아서 아예 제주 모경찰서로 발령받은 여동생이 안내를 자처한다. 고사리는 날 때 톡톡 끊어주면 두세 번 더 키워서 먹을 수 있다니 왜 산으로, 들로 아낙들이 바지런히 나서는지 알 수 있다. 고사리해장국은 제주 사람들의 '소울푸드'다. 예부터 논농사 못 짓는 제주에서 소보다는 돼지가 키울 수 있는 가장 친근한 가축이었고 어지간한 잔치에서는 항상 돼지가 멱을 따며 잡혔다. 도마에 뭉텅뭉텅 썰어 내는 돔베고기며, 고기붙이 나누고 나서도 돼지 뼈로 곤 육수는 어디든 활용 가능했다. 해조류 모자반을 넣고 뭉근하게 끓이면 '몸국(모자반국)'이 되고, 뼈붙이 덩어리를 한 개라도 넣으면 '접작뼈국'이 되고, 고사리를 넣고 끓이면 '고사리해장국'이 됐다. 육지에서 즐기는 '육개장'에서 보듯 고사리는 소고기를 대신하는 식감과 질감을 갖고 있는 터, 여기에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가루까지 풀면 걸쭉하면서 감칠맛도 은은하게 탑재한 고사리해장국이 된다. 김이 폴폴 나는 고사리해장국을 보면 생긴 건 메밀가루 때문에 약간 갈색이 섞인 거무튀튀한 빛깔이지만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으면 이내 구수한 맛이 일품인 고사리와 메밀 쌍두마차가 혀를 부드럽게 자극한다. 고사리와 메밀가루의 맛이 조화로운 고사리해장국.(필자 제공) 메밀 전분이 풀어져서 걸쭉한 국물은 전혀 자극적이지 않다. 누구 말처럼 "나 고사리야 나 메밀이야" 하는 정도랄까? "제주 사람들은 이 맛을 '베지근하다'고 표현하거든. 베지근하다는 말로 싹, 정리 된다." 벌써 제주 생활 5년 차에 접어든 여동생이 아는 체를 제법 한다. '베지근하다'는 제주 사투리로 고기 따위를 푹 끓인 국물이 구미가 당길 정도로 맛있다는 의미다. 기름진 맛이 깊으면서도 담백할 때 이 표현을 쓰는데, 그만큼 속을 든든하게 채운다는 의미도 있다. 어쨌거나 "국물맛이 베지근하우다!" 하면 맛을 제대로 칭찬하는 최상급 표현이란다. 밥 한 공기 말면 고사리해장국의 농밀한 국물이 더욱 걸쭉해진다. 흡사 죽처럼 되직한 고사리해장국은 입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술술 넘어간다. 제주 사람들의 인생은 가난과 통한의 연속이었으나 이들은 기어이 이리도 담백하고 유순한 맛을 낳았다. 고사리해장국집 창 너머로 유채꽃 일렁이고 우뚝 솟은 산방산이 보인다. 산방산 발아래 엎드린 용머리해안도 그려진다. 유채꽃이 핀 산방산.(필자 제공) 오늘만큼은 고사리해장국으로백만 년을 관통한다. 자연도, 인간도, 이 감사한 음식을 맛 봬 준 식당 주인장도, 무엇보다 타향살이를 잘 견디고 언니의 제주 손발이 되어준 여동생도, 우리 모두 다들 "폭싹 속았수다." ('폭싹 속았수다'는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의미의 제주도 방언) ◆ 제주 사계리 용머리해안 주소|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112-3 영업시간|연중 상이 (* 입장 시간 꼭 확인) 문의전화|064-760-6321 ※ 주차장 있음·제주도민 외 입장료 있음 ◆ 이윤희 방송작가, 로컬문화 전문가TV조선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 KBS '한식연대기', 넷플릭스 '삼겹살 랩소디', 스카이트래블 '한식기행 - 종부의 손맛' 등 우리 식문화를 소재 삼아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집필했다. 방송작가 23년 차지만 언제나 현역~! 지역마다의 고유한 맛과 멋을 알리는 맛깔난 글을 쓰고 싶다. 2025.04.03 이윤희 방송작가, 로컬문화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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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고령화 대극복 일과 가정의 균형, 저출생 극복의 새로운 해법 저출생 문제는 단순한 인구 감소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 사회, 교육, 국가 전반에 영향을 미쳐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우리의 이웃에게 나타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 기업, 근로자가 공동으로 새로운 해법을 찾아 나서야 한다. 김기탁 가치자람 아빠육아문화연구소장, 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자문위원 저출생 문제는 이제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위기로 자리 잡고 있다. 단순히 출생률 감소를 넘어, 경제 생산인구 감소, 고령화, 일자리 감소, 그리고 지역기능 소멸 등 여러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는 국가 경쟁력과 사회 서비스 저하 뿐 아니라,국방력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제2의 도시로 불리는 부산 중구의 인구는 2025년 2월 기준 3만 7370여 명이다. 한국방송공사(KBS)와 국토연구원이 분석한 사실에 바탕을 둔 미래 시나리오에서 부산 중구는 기능소멸이 16년 남았으며 사회 서비스의 제공이 어려워질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또한, 2025년 현재까지 부산시에서 문을 닫은 학교가 50곳에 육박한다고 한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 그리고 근로자들이 공동으로 노력을 기울이는 새로운 해법이 필요하다. 저출생으로 인한 학령 인구 감소로 올해 문을 닫는 초·중·고교가 전국에 49곳인 것으로 집계된 가운데 사진은 24일 오전 올해 3월 1일자로 폐교를 앞둔 경기 안산시 상록구 경수초등학교의 모습. 2025.2.24.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정부는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일·가정 양립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고 기업들이 이를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만 대기업에 비해 중소기업들이 대체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정부는 기업 성장 컨설팅, 대체 인력 지원금, 육아휴직을 위한 재정적 인센티브, 세제 혜택 등을 다각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이를 통해 기업들이 유연근무제, 육아휴직과 대체 인력 제도를 보다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실효성 있게 운영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기업들이 모성보호제도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도록 발상의 전환을 통해 벌칙적 요소들을 부각시키기 보다 기업들이 좋아하는 이익을 기반으로 한 모성보호제도를 통해 기업에 이득이 되는 부분들을 더욱 강조하여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정책적 지원을 신설·강화해야 한다. 정부와 더불어 기업도 저출생 문제 해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특히 기업 내에서 육아휴직과 유연근무제 등 일·가정 양립을 위한 제도를 도입하고 활성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다. 이러한 제도들이 잘 작동하면 근로자들의 복지가 향상되고, 기업의 생산성도 증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롯데 그룹은 남성 육아휴직 1개월 의무화와 같은 정책을 도입하여, 조직 내 동료들이 대체 인력을 대신해 육아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변화는 기업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며, 직원들이 육아휴직을 사용하기 위한 심리적 장벽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육아휴직을 의무화하고, 이를 성과 평가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기업들이 육아휴직 의무화를 통해 저출산 문제에 기여하면, 이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과 동시에 직원들의 만족도를 높이고, 이직률을 줄이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기업들이 이와 같은 제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단순히 사회적 책임을 넘어, 장기적으로 인건비 절감과 생산성 향상, 인재 확보에 도움이 되기에 적극적인 사회적 동참이 필요하다. 기업의 이러한 노력은 근로자들도 변화시킨다. 특히 남성들이 육아휴직을 평등하게 사용하는 것은 가정 내 역할 분담을 개선하고, 여성의 경력단절을 방지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실제로, 2005년 남성 육아휴직자는 200여 명이었지만, 현재는 4만 명을 넘었고, 전체 육아휴직자의 30% 이상이 남성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는 정부 지원과 사회적 인식과 기업 문화의 변화가 맞물려 이루어진 성과이다. 남성들이 육아휴직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 이는 단순히 가사와 육아의 분담을 넘어서, 사회 전반의 평등한 노동 분배를 촉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남성 육아휴직 사용이 증가하면, 여성들이 경력을 유지하면서 노동 시장에 계속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이는 경력단절을 방지하고, 가족과 기업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 2025년 민주노동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여성의 경력 단절률은 61.9%에 달하는 반면, 남성은 40.6%로 나타났다. 특히, 여성은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이 20%였지만, 남성은 4.5%에 불과했다. 이는 남성의 육아휴직 사용이 경력단절을 줄이는 데 큰 기여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롯데그룹의 사례를 보듯 육아휴직을 의무화하는 정책이 시행되면, 아빠들의 육아 참여가 늘어나고, 이는 가족 내 역할 분담을 공평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보건복지부가 운영하는 서울시 100인의 아빠단은 다자녀 가정이 55%이며 다자녀 가정에서 아빠의 육아 참여가 증가할수록 엄마의 사회진출은 활발해졌다고 한다. 2024년 둘째아 출산자는 전년 대비 2.1% 증가한 약7만 5900명에 달했다. 이는 아빠들이 육아에 참여하면서 출산율 증가에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여성가족부의 통계에 따르면, 남성 육아휴직자가 증가하면서 여성의 경력 단절도 줄어드는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인천 미추홀구 아인병원에서 신생아들이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다. 2025.2.26.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저출생 문제는 단순한 인구 감소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 사회, 교육, 국가 전반에 영향을 미쳐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우리의 이웃에게 나타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 기업, 근로자가 공동으로 새로운 해법을 찾아 나서야 한다. 정부는 기업과 근로자에 대한 파격적인 혜택을 강화하고, 기업은 일·가정 양립을 실현하는 조직문화를 개선하며, 근로자는 육아휴직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특히 남성들이 육아휴직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 이는 가정과 기업 모두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결국 사회 전체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은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정부, 기업, 근로자가 서로 협력하여 인식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해법에 도달해야 한다. ◆ 김기탁 가치자람 아빠육아문화연구소장, 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자문위원 저출산고령화위원회 자문위원이자 가치자람사회적협동조합에서 아빠육아문화연구소장으로 근무 중이다. 보건복지부 100인의 아빠단으로 활동하며 세 아이와 함께 소통하는 아빠로 성장할 수 있었다. 아빠육아와 남성육아휴직 인식문화 확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25.04.01 김기탁 가치자람 아빠육아문화연구소장, 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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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고령화 대극복 시설에서 '생활'을 찾다 국가의 유니트케어 도입 확대 노력은 환영할 정책이며 초고령사회 진입 국가로서 서둘러 정착되어야 할 사업이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우리나라의 장기요양시설이 재택 요양돌봄의 또 다른 장소로서 연계·확장된 개념으로 안착하여 Aging in Place 실현을 견인하기를 기대한다. 고영호 건축공간연구원 연구위원·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민간위원 우리는 체중의 증감과 체형의 변화를 경험하며 자신에게 더 알맞도록 옷가지를 바꾸게 된다. 우리나라 역시 초고령사회에 진입하고 베이비부머가 어르신이 되는 등 상황 변화에 따라 어르신 돌봄이 변화하고 있다. 시설급여 장기요양기관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어르신은 건강한 상태에서 노화와 질병 등의 이유로 돌봄이 필요한 상태로 바뀌게 되면 장기요양급여 등급판정을 통해 장기요양보험으로부터 요양과 돌봄에 사용되는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다. 어르신의 요양과 돌봄이 자신의 집에서 이루어지면 재가급여, 요양시설에서 이루어지면 시설급여이다. 시설급여 장기요양기관은 시설의 정원을 기준으로 9인까지 생활할 수 있는 공동생활가정과 10인 이상이 함께 지내는 요양시설로 구분된다. 기존 노인요양시설은 의학적 치료와 공급자 중심의 획일화된 서비스에 중점을 둔 의료보호시설로 운영되었으며, 시설에서 생활하는 어르신은 기존의 사회적 관계성이 단절된 채 사생활과 존엄성, 즐거움과 같은 인간으로서 보장받아야 할 기본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TV 시청 등으로 시간을 보내며 "의미 없는 매일"을 지내야 하는 곳이었다. 요양시설에 들어가는(입소) 것은 곧 죽을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현대판 고려장과 다를 바 없다고 많은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는 이유일 것이다. 어버이날인 8일 오전 광주 북구 동행재활요양병원에서 입소환자가 가족과 영상통화를 하고있다. 2024.5.8.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러한 노인요양시설이 최근 바뀌고 있다. 공급자 중심의 시설환경은 이용자 중심의'집'과 같은 생활환경과 서비스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기존의 다인실과 복도형 배치의 일률적 평면구성은 안정적 개인공간 중심의 소규모 생활공간 배치와 구성으로 변화하고 있다. 시설에서의 생활이 집과 같은 환경이 된다는 것의 가장 핵심은 시설에서의 식사와 활동 등빼곡하게 짜여진일정에 어르신을 끼워 맞추는 방식이 아닌 어르신이 원할 때 식사하고 활동할 수 있음에 있다. 평면구성과 공간배치 역시 시설에서의 사생활 영위를 위한 개인실과 요양돌봄의 공동생활을 위한 거실과 프로그램실이 집과 같이 구별과 연계를 반복하며 공간적 위계를 갖는다. 기존 요양시설(좌)과 유니트케어 요양시설(우) 평면구성. (출처='일본 유니트형 노인요양시설의 기능별 공간구성 분석'- 남윤철, 한국농촌건축학회논문집.20(3)) 집과 같은 생활 지원을 위해 개인실에 화장실과 세면대 등이 설치됨은 당연하다. 기존의 공급자 중심 시설환경이 조성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살펴보면 입소자의 자부담과 국가의 지원이 합쳐져 시설 운영자에게도 아무쪼록 남는 장사가 되어야 할 터인데, 법이 정하는 시설 유형별 최소 인력배치 기준과 요양돌봄 행위의 수가 산정에서는 요양돌봄의 최대 효율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요양돌봄자의 효율적 조치 요구는 다인실과 복도형 배치, 일정에 따르는 식사와 활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급자 중심의 급식과 요양, 일상생활 필요 편의 제공의 기본적 돌봄이 주어지는 대규모 집단생활의 병원 같은 환경에서 보호받고 수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과 일본의 기존 어르신 요양시설 상황도 우리나라의 기존 상황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1980년대 초 미국 요양시설 거주 노인의 권리 보장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며 인간 중심 돌봄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으며, 시설에서의 간호보다는 시설에서의 집과 같은 생활 영위가 주목받았다. 일본은 1990년대 후반 집과 같은 환경에서 요양서비스 제공을 위한 10명 정도를 하나의 생활단위(유니트)로 묶어 유니트별 요양돌봄을 편성, 요양시설에서 공급자의 요양돌봄 단위와 이용자의 생활단위를 소규모로 일치시키는 유니트케어를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기존 다인실, 복도형 구조를 개인실 및 거실 구조로 개선하고 입소 어르신이 시설에서 "지내는" 것이 아닌 "생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일본의 유니트케어 시행 이후 변화된 시설 생활 어르신의 삶의 행태도 기존에는 침대에만 누워 계시던 상황에서 거실과 개인실에서 활발한 여가·교류 시간이 증가하였으며, 정책 시행이 자리를 잡아가며 요양보호사들의 돌봄 근무 강도는 감소하며 소규모 유니트 중심으로 보다 세심한 요양돌봄 제공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연구결과 확인되었다. 나아가 유니트케어 시설로 전환됨에 따라 발생하는 입주정원 감소분을 지역의 소규모 다기능 서비스 거점(주간보호센터 등)으로 이주시켜 요양시설의 기능이 지역사회 차원에서 연계되었으며, 시설 생활 어르신의 지역 공동체 유대감이 향상되었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인간 중심 돌봄과 시설에서의 집과 같은 생활 지원을 위해 보건복지부는 "제3차 장기요양기본계획(2023~2027)"에서 한국형 유니트케어 도입을 제시하고, 2024년 3월에는 "제1차 유니트케어 시범사업 시행계획"을 공고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니트케어 도입 지원을 위한 국가 시범사업이었던 만큼 최소한의 시설요건과 인력배치와 교육요건이 제시되었으며, 공모사업 설명회에도 많은 요양시설 운영 관계자의 참석과 질의응답이 이루어졌다. 보건복지부는 2025년 7월 제2차 시범사업 운영을 위해 4월 중 유니트케어 시범사업 참여기관 공모를 진행할 예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운영 중인 약 6000개 시설급여 장기요양기관이 모두 유니트케어를 도입할 수 있는 실정은 아니다. 주로 상가 등의 근린생활시설로 건축된 공간을 임차하여 운영되는 9인 이하의 공동생활가정 시설과 주로 개별 건물을 건축하여 운영되는 30인 이상의 요양시설은 기존의 편복도형 내부 평면구성의 변경과 개인실 중심의 편성이 쉽지 않고, 유니트 구성과 케어를 위한 간호사와 요양보호사 등의 인력배치 요건을 충족시키며 제한된 공간 내 개인실과 거실·프로그램실을 집과 같이 조성함과 동시에 이를 통한 시설 운영의 수익을 유지 또는 증대하는 것도 쉽지 않다. 요양시설에서 지내시다 도무지 못 견디겠다고 퇴소하시고 살던 집으로 돌아오셔서 시설 대비 부족한 요양돌봄을 받더라도 '내가 원할 때 밥 먹고, 내가 원할 때 활동하는 게 좋다'라는 어르신의 인터뷰가 인상적이다. 집과 같은 환경에서 인간 중심의 돌봄이 실현되는 것은 짜여진시설운영 일정에 어르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정든 집을 떠나 시설에서 지내실 수밖에 없는 어르신에게 맞추는 요양돌봄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의 유니트케어 도입 확대 노력은 환영할 정책이며 초고령사회 진입 국가로서 서둘러 정착되어야 할 사업이다. 하지만 전국에 확산되어 있는 기존의 장기요양시설이 유니트케어의 직접 적용이 어려운 상황을 고려하여 '준유니트케어' 정도라도 적용해 볼 수 있도록 지원하고 시설 운영자와 이용자가 보다 빠르게 유니트케어를 경험하고 필요성을 공감하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우리나라의 장기요양시설이 재택 요양돌봄의 또 다른 장소로서 연계·확장된 개념으로 안착하여 Aging in Place 실현을 견인하기를 기대한다. ◆ 고영호 건축공간연구원 연구위원, 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민간위원 건축공간연구원 고령친화정책연구센터장, 기획재정부 인구위기대응 TF 고령사회 대응반 위원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현재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민간위원, 국토교통부 인구대응협의체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령자 주거와 복지의 연계, 고령친화 공동체마을 등에 대한 고령친화 건축도시공간 정책연구 전문가이다. 2025.03.28 고영호 건축공간연구원 연구위원·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민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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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인생 평생 현역의 꿈을 실천하려면? 직장인이 끊임없이 시대의 변화를 읽고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거나 개선시키려는 노력을 해나간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노력은 창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새로운 일을 통해 기존의 직장에서 보다 유리한 위치에 설 수도 있고, 스카우트되어 갈 수도 있다.평생 현역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강창희 행복100세 자산관리연구회 대표 "아니, 누가 일을 하기 싫어서 안 하나요? 일만 줘보세요. 일이 없잖아요?" 이런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청년실업이 넘쳐나고 있고 있던 직업도 사라지는 시대이다. 그러니 퇴직자들에게 돌아갈 일이 없지 않은가? 사실 그렇다. 그래서 퇴직자들이 일을 하려면 현역세대들이 할 수 없는 일이거나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하려고 하지 않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가장 바람직한 건 현역세대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다. 현역시절에 해온 일과 미래의 직업을 연결시켜서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지금은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동시에 새로운 일이 생겨나는, 이른바 창직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창직이란 '기존에 없던 직업이나 직종을 새롭게 만들어 쓰거나 재설계하여 새로운 개념의 직업·직종으로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창직전문가'라는 명함을 갖고 일하는 사람도 있다. 창직연구소, 창직교육원, 창직협회, 창직전문가 과정과 같은 단체도 생겨나고 있다. 저출산·고령화, 여성의 경제활동인구 증가, AI 등 첨단과학기술의 발전, 판매·의료 등 서로 다른 산업의 융합화 추세 등을 감안할 때 앞으로 창직의 대상이 될 직업·직종 또한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다. 서울 마포구 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머리가 장년(長年)층 구직자가 일자리 정보 게시판을 살펴보고 있다. 2025. 2. 19.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5년마다 발표되는 '한국직업사전'에 등재된 우리나라 직업의 수는 1969년의 경우 3260개였는데 2019년에는 1만 6891개로 늘어났다. 같은 시기 일본의 직업 수는 2만 5000개, 미국은 3만 654개였다. 우리나라도 2024년의 직업 수는 훨씬 더 늘어났을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아이패드 화가, 반려동물 장의사, 인터넷 장의사, 정리컨설턴트와 같은 직업이 생겨났다는 말을 들은 일도 있다. 창직전문가인 맥아더스쿨 정은상 교장 같은 경우는 십수년 전부터 스마트기기와 페이스북 등 SNS를 활용하여 은퇴자들의 창직 지원 활동을 해왔다. 그동안 만들어 낸 직업만 해도 퍼스널브랜드 코칭을 통해 베이비부머들의 인생 이모작을 안내하는 자신의 일을 포함해 아이패드 닥터, 포토북 전문가, 여가생활 코치, 모바일쿠킹 스쿨, 토론학교 등 10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필자 또한 52년 전 금융투자업계에 입문할 때는 퇴직 후 노후설계 교육활동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창직의 경험을 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쑥스럽지만 창직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 경험을 소개한다. 2000년대 초 펀드를 운용하는 한 자산운용사의 CEO를 맡고 있을 때의 일이다. CEO업무를 하면서 보니 펀드비즈니스가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운용만 잘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투자자들이 단기시황 전망에 쫓겨 빈번하게 샀다 팔았다를 반복해서는 안되고 장기투자, 분산투자의 원칙을 지키도록 설득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미국, 일본의 자산운용업계를 살펴보았다. 투자교육활동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케팅 활동의 일환으로 그 일을 시작했다. 이후 베이비부머세대들의 퇴직이 가까워 지면서 노후설계에 대한 질문도 받게 된다. 대답을 위해서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CEO에서 물러나면서 다른 데서 CEO 자리를 구해 몇 년 더 하는 것보다는 투자교육·노후설계교육을 라이프워크로 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한다. 한 금융그룹에 투자교육연구소 설립을 제안했다. 이 때의 경험을 통해 제안력의 중요성 깨닫게 된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지금까지 20년 넘게 이 일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투자교육, 노후설계 교육활동을 해오던 중 2020년에 코로나 사태를 만나게 된 것도 새로운 계기였다. 강의활동, 세미나 활동이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그 때 유튜브를 만난다. 유튜브 영상을 찍어서 올려보니 영상에 따라서는 조회수가 수백만 회가 넘게 나오는 것이다. 1년에 대면강의를 200회 한다 해도 1회에 평균 50명을 대상으로 한다면 1년에 1만 명 정도 밖에 들을 수 없다. 그런데 유튜브는 한번에 100만 명 넘게도 들을 수 있다. 투자교육, 노후설계교육에서 유튜브의 위력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물론 '창직'이라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필자의 경험 또한 우연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직장인이 끊임없이 시대의 변화를 읽고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거나 개선시키려는 노력을 해나간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노력은 창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새로운 일을 통해 기존의 직장에서 보다 유리한 위치에 설 수도 있고, 스카우트되어 갈 수도 있다. 또, 퇴직 후에는 재취업이나 프리랜서 또는 창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평생 현역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강창희 행복100세 자산관리 연구회 대표, 전 미래에셋 부회장대우증권 상무, 현대투신운용 대표, 미래에셋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행복100세 자산관리 연구회 대표로 일하고 있다. 대우증권 도쿄사무소장 시절, 현지의 고령화 문제를 직접 마주하면서 노후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품격 있는 노후를 보낼수 있는 다양한 설계방법을 공부하고 설파하고 있다. 2025.03.25 강창희 행복100세 자산관리연구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