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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향적 성격을 지닌 두 명의 예술가, 그들의 공통된 특징 휴리스틱은 인간사고의 특징 중 하나다. 휴리스틱은 발견하다(to find)라는 뜻의 그리스어 Heutiskein에서 유래했으며, 경험에 의한 추측이나 직관적인 판단을 뜻한다. 휴리스틱은 인간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판단기술이 되기도 한다. 우리 뇌가 복잡한 것을 피하고 삶을 단순화시키길 원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휴리스틱은 때때로 논리적이지 못한 오판으로 심각한 위험을 자초한다. 바로 감정에 쉽게 좌우되어 판단하는 감정 휴리스틱때문이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휴리스틱을 말하는 행동심리학자와 행동경제학자들은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이라고 판단한다.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간에 세상을 살아가며 상처를 받고 감정에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상처받은 우리는 종종 자기연민에 빠져들기도 한다. 자기연민의 감정이 깊어지면 자존감이 하락하고 우울감과 무기력감으로부터 빠져 나오기 힘들어질 수 있다. 이렇게 하락한 자존감의 늪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스스로에게 위로와 선물을 주는 것이라 말한다. 그 중 글쓰기는 훌륭한 자기 선물이자 치료요법(WET) 중 하나라고 한다. 글을 쓰며 자신의 아픔을 돌아보고 서술과 명료화 과정을 통해 마음의 상처로부터 회복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결핍이 존재한다. 위대한 예술가 또한 상처와 결핍을 통해 자아를 성장시키고 완성해 나아간다. 작가가 글로써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다고 하면 음악가와 화가 역시 음악과 그림으로 자신을 치유한다고 볼 수 있다. 음악과 그림도 청각과 시각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차이코프스키와 드가 또한 결핍이 그들 예술세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자기연민이라는 감정적 에너지를 이용하여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을 이끌어 내었다. 내향적 성격을 가진 두 명의 예술가는 법대를 다녔다는 점 이외 자기연민이라는 키워드를 함께 갖고 있다. 과연 그들의 예술에는 어떤 공통된 특징들이 있을까? ◆ 내면아이 내면아이는 어린 시절 받은 상처로 인해 여전히 성장하지 못한 상태로 있는 자아를 말하는 심리학 용어다.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어린 시절의 아픔과 상처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가족으로부터 기인한 경우가 많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자아형성에 영향을 주며 형성된 자아는 창의력의 원천으로 감성과 직관을 통해 드러난다. 차이코프스키와 드가는 어린 시절 유복했던 가정환경과는 다르게 우울한 나날들을 겪었다. 두 명 모두 유년시절 여성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그들의 예민한 감수성을 자극하였으며, 이후 예술세계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서울사이버대학교 캠퍼스에 세워진 차이코프스키의 실제 크기 동상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러시아의 광산마을 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났다. 퇴역중령출신의 아버지는 광산의 감독관이었고 어머니는 독일과 프랑스계 혼혈인이었다. 차이코프스키는 4살때부터 가정교사였던 22세의 프랑스여성 파니 뒤르박(Fanny Durbach)에게 외국어와 피아노를 배웠다. 그녀의 가르침 덕분에 2년뒤 불어와 독어에 능통해졌고 3년뒤에는 쇼팽의 마주르카를 쳤다. 하지만 얼마 후 아버지가 다른 도시로 전근을 가야 했기 때문에 다정다감했던 가정교사와 이별해야 했다. 이때의 충격으로 그는 말수가 적어졌으며, 이런 성향은 그가 법률 예비학교에 입학할 10살의 나이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14세에는 어머니가 콜레라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트라우마는 더욱 심해졌다. 그는 어머니를 위해 왈츠를 작곡했는데, 그의 왈츠나 춤곡들 중 여러 멜로디들이 감상적인 것은 이러한 유년의 기억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추측된다. 드가 역시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가 그의 예술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드가의 어머니는 혼혈(크리올-Criole)로 외모가 매우 아름다웠다.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할 유년시절 드가는 어머니와 삼촌의 불륜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가정을 위해 침묵했고, 아직 애정이 필요한 드가 나이 13살에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런 성장배경은 드가의 예술 세계에 영향을 주었고 그의 작품이 여성혐오라는 논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드가의 작품 마네와 마네부인의 초상은 동료인 마네 아내의 얼굴부분이 칼로 도려져 있다. 마네가아내얼굴이 마음에들지 않게 그려졌다며 칼로 자른 것이다. 드가는 여성의 얼굴을 아름답게 그리기 싫어했다. 드가가 그린 메리 커셋의 초상화도 당대 여류화가였던 커셋 본인으로부터 공분을 샀으며, 소설가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는 1886년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드가가 작품 속 여성들에게 모욕감을 주었고 묘사방식 또한 잔인하다고 평했다. 드가 사망 이후 스튜디오에 남겨진 스케치와 작품 속 추악한 여성의 이미지는 그의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어떻게 투사되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드가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그의 완고한 성향은 아마도 내면아이의 모습이 드러난 결과처럼 보인다. ◆ 발레 차이코프스키와 드가에게 발레는 그들의 대중적 인기를 보다 높여준 예술 장르다. 발레는 그들 예술세계를 대표하는 중요한 주제였으며 새로운 예술적 발견과 성취를 보여준 장르이다. 차이코프스키는 어린 시절 발레동작을 친구에게 보여주는 등 발레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는 총3개의 발레 곡을 작곡하였는데 현재 모두 고전발레를 대표하는 명작이 되었다. 먼저 백조의 호수는 볼쇼이 극장 측으로부터 의뢰 받고 작곡한 작품으로 발레음악에 대한 열정을 갖고 착수한 최초의 작품이다. 이는 그가 동료인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차이코프스키의 열정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초연은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발레음악이 단지 춤 동작에 맞추는 부수적요소로 여겨졌으며 안무 또한 빈약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 사후 당대 최고의 안무가 프티파와 이바노프의 안무로 재탄생한 백조의 호수는 현재 고전발레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샤를 페로의 동화에서 스토리를 가져온 두 번째 작품 잠자는 숲 속의 미녀는 초연부터 굉장한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안무와 대본 모두 프티파가 만들었다. 백조의 호수와 잠자는 숲 속의 미녀모두 아름다운 바이올린 솔로가 나온다는 공통점이 있다. 마지막 작품인 호두까기 인형은 연말에 자주 공연되는 대중적인 작품으로 아름다운 멜로디와 크리스마스의 동화적인 분위기가 특징이다. 특히 파리여행 중 발견한 첼레스타(Celesta)라는 악기는 별사탕 요정의 춤부분을 동심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드가 또한 발레는 그의 예술세계를 대표하고 있다. 드가가 평생 그린 그림의 절반 이상인 600여 점이 춤추는 발레리나를 그린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중 발레그림이 많은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먼저 드가는 공연장 상위등급의 연간회원으로 공연장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그리고 경제사정이 어려워 지자 자신의 그림을 팔아야 했는데, 발레 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구매자들에게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리는 당시 인상주의자들과 다르게 햇빛이 아닌 인공광 아래서 작품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발레리나들은 지금과 같은 대우를 받는 예술가들이 아니었다. 어린 발레리나를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성적착취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림 속 어둡게 그려진 남성들은 이런 시대적 쓸쓸함을 보여주고 있다. ◆ 오페라 오페라는 문학과 음악 그리고 춤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이다. 두 명의 예술가가 살았던 19세기 유럽에서 오페라는 가장 인기 있고 흥미로운 순수예술이자 고상한 취미 활동이었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와 드가에게 오페라는 오랜 시간 함께한 예술적 소재였다. 먼저 차이코프스키는 평생 동안 11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오페라에 매진했던 푸치니가 총 12개의 오페라를 남긴 것을 감안한다면 교향곡과 협주곡 등 다양한 작품 활동한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개수는 상당히 의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1867년부터 1891년까지 거의 20년 넘게 오페라를 쉬지 않고 작곡했다. 차이코프스키 오페라의 중요한 특징은 그 매력적인 선율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문학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페라 작품의 대부분이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 등 러시아 문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물론 쉴러나 헤르츠 같은 독일 문학가의 작품에서 스토리를 가져온 작품도 있지만, 각본과 대본은 자신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러시아어를 사용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오페라 중 하나인 에브게니 오네긴또한 푸쉬킨의 운문소설이다. 이 작품은 비제의 카르멘을 본 차이코프스키가 인간의 심리와 비극적인 소재에 감명받아 작곡되었다. 3막에 나오는 폴로네이즈로도 유명한 이 작품은 차이코프스키의 5번째 오페라이며 그에게 첫 성공을 가져다 준 작품이기도 하다. 오페라는 드가에게도 중요한 예술적 모티브였다. 어린 시절부터 드가는 음악적 환경에서 성장했다. 은행업을 하던 아버지 오귀스트는 음악에 열정이 있었으며 정기적으로 살롱음악회를 주최하는 등 음악가들과도 자주 교류하였다. 드가도 이런 살롱음악회에 자주 참석했으며, 모임에 참석한 음악가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드가는 오페라를 감상하고, 작품을 그리기 위해 오페라 하우스를 종종 방문했다. 그는 두 곳의 오페라 하우스를 소재 삼아 그렸는데, 현재 파리의 대표적 극장인 오페라 가르니에와 지금은 없어진 르 펠레티에이다. 드가는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보이는 가르니에보다 웅장하지는 않지만 음향적으로 훌륭하고 가스등을 사용한 최초의 극장인 르 펠레티에에 많은 애정을 갖고 있었다. 1860년대 중반부터 20세기초 드가 작품에서 오페라는 늘 중심에 있었다. 그는 오페라의 무대와 로비, 박스석, 계단, 복도 등 다양한 장소에서 무용수와 음악가를 비롯한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관찰했다. 친구이자 오케스트라의 바순연주자인 데지레 디하우를 정면에 배치한 작품 오페라 오케스트라나 알베르 불랑제 카베와 마주한 알레비또는 연습에 지친 어린 무용수를 그린 그림들은 인물의 심리적 진실을 말하고 있다. 드가는 오페라를 통해 끊임없이 실험하고, 구분 해체했으며창의적인 예술 기법을 재창조 했다. ◆ 보수 속 진보 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차이코프스키와 드가는 19세기를 후반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당시 진보적인 분위기가 태동하는 시기에 보수적 성향을 유지했다. 이는 그 시대 보수적 감성과 그들의 성향이 잘 맞았던 부분도 작용했지만, 대중을 무시할 수 없고 현실을 살아야 하는 예술가의 딜레마이기도 했다. 현재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러시아 고전음악의 완성형으로 평가 받고 있다. 당시에는 민족적이지 못하다고 자국의 비판 받았고 서유럽에서는 너무 대중적이라며 평가절하했다. 하지만 대중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색채에도 불구하고 그의 협주곡과 실내악곡, 오페라 등의 연주기법은 상당히 진보적인 것이었다. 지금은 콘서트 장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음악이지만 당시 그의 협주곡들은 연주불가일 정도로 기술적으로 진보적이었다. 드가의 작품도 당시 진보적이던 인상주의자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자연에서 얻는 그림의 소재를 거부하며 기억에 의해 걸러지고 상상력에 의해 풍부해진 극장의 장면들을 제시했다. 이는 인상주의가 빛과 색채의 자유로움을 추구했고 드가는 구도와 공간 속 자유로움을 좀더 추구했기 때문이다. 차이코프스키와 드가는 아름다운 선율과 파스텔 톤으로 우리를 매혹시켰다. 그들은 어떤 한 장르에 머무르지 않고 발레와 오페라 협주곡 등 다양하게 자신의 세계를 개척해 나아갔으며, 나이가 들어 시력이 안 좋아지자 회화에서 조각으로 매체의 전환을 시도했다. 그들을 과연 보수적인 예술가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아마도 보수 속 진보를 추구한 예술가일수도 있다. 예술가는 머무는 존재일수 없기에. ☞ 음반추천 차이코프스키의 발레음악은 앙세메르와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추천한다.로스트로포비치와 베를린 필의 모음곡집도 좋다. 오페라 에브게니 오네긴의 폴로네이즈는 카라얀과 베를린 필, 아바도의 실황음반도 생동감 넘친다. 에브게니 오네긴하이라이트는 제임스 레바인의 지휘와 드레스덴 스타츠 카펠레의 음반도 좋다. ◆ 김상균 바이올리니스트서울대 음대 재학 중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비엔나 국립음대와 클리블랜드 음악원 최고연주자과정 최우수 졸업. 이 후Memphis 심포니, Chicago civic오케스트라, Ohio필하모닉 악장 등을 역임하고 London 심포니, Royal Flemisch 심포니 오디션선발 및 국내외 악장, 솔리스트, 챔버연주자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eigenartig@naver.com 2024.07.24 김상균 바이올리니스트
- 한국이 체코 원전 단독협상자로 선정된 비결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 8년을 달려온 체코 신규원전사업에 굵은 매듭이 지어졌다. 지난 7월 17일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두코바니 5·6호기 2기는 약 4000억 코루나(약 24조 원)에 해당한다. 2025년 3월 계약까지 복잡한 협상의 과정이 남아있지만, 이제는 단독 협상자가 되었다. 2022년 3월 최초입찰에서는 두코바니 5호기 1기뿐이었으나 체코 정부가 원전 여러 기를 동시에 건설하면 단가를 크게 낮출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이후 3기를 추가한 4기(두코바니 5·6호기, 테므린 3·4호기)에 대해 비구속적 제안서를 요구하였다. 이번에 빠진 테므린 3·4호기도 약간의 정치적 문제가 해결되면 곧 확정될 것이다. 선정의 비결은 간단하다. 물건이 좋고 판매자가 믿음직한 것이다. 살펴보자. 첫째, 우리가 수출하려는 원전은 APR1000이다. 이는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에 수출했던 원전을 유럽형으로 개조한 APR+(1500 메가와트(MW)급)를 입찰조건에 맞추어 1000MW급으로 줄인 것이다. 단순히 그렇게 출력을 낮춰서 설계하기로 결정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 설계를 수행하여 2023년 3월 유럽사업자요건(EUR) 인증을 취득하였다. 이는 유럽에서 인허가성과 안전성을 미리 확인한 것이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증해 보이는 것이 기술력이다. 둘째, 경쟁국이었던 프랑스 전력공사(EdF)가 핀란드와 자국에서 건설중인 올킬루오토 원전 공사기간을 13년 지연시켰고 프라망빌 원전은 7년을 지연시킨데 반해 우리는 UAE에서 당초 약속한 일정을 준수하였고 예산도 초과하지 않았다. 또한 체코와의 지리한 입찰과정에서 단 한번도 일정을 연장해 줄 것을 요구하지 않고 제때 서류를 제출하였다. 신뢰를 쌓은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우리가 원전건설을 지속하면서 부품 공급망과 건설 경험인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이 역사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우월하여도 몇십 년간 신규원전 건설을 하지 않으면서 기술력이 약화되었다. 물론 이것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회복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우리가 기술적 우위와 이로 인한 가격경쟁력을 갖게 된다. 두코바니 5·6호기는 시작에 불과하다. 테므린 3·4호기도 남았고 네덜란드, 슬로바니다, 핀란드, 스웨덴, 폴란드, 사우디아라비아, UAE 추가원전도 남아있다. 사진은 체코 신규원전 예정부지 두코바니 전경.(한국수력원자력 제공) 그러나 우리의 원전 수출에는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우리가 원전 수출을 위한 협상을 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질문은 대한민국이 원자력을 계속할 것을 보장할 수 있는가?이다. 우리로부터 원전을 수입한 나라는 핵연료와 각종 부품이 공급되기를 원한다. 원자력발전소 운영중에도 다양한 엔지니어링 문제가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기술의 지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만일 또다시 탈원전 정책을 펼치는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면 이러한 공급이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원자력이라는 가치중립적 과학에 정치가 개입된 결과이다. 정치의 영역에서 각성이 필요하며 이를 담보하기 위한 여야간 합의 그리고 이를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 탄소중립은 세계적인 수요가 되었다. 2018년 송도에서 개최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에서는 지구온도증가를 1.5도씨 이내로 하기 위하여 원자력발전을 대폭 늘리는 시나리오가 제시되었다. 지난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서도 원자력발전을 3배로 늘여야 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그렇다면 세계적으로 적어도 1000기의 신규원전을 필요로 한다는 얘기다. 이는 우리와 우리 경쟁국 모두가 다 달려들어도 건설할 수 없는 많은 물량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시장에 준비되어 있을까? 지금의 한수원과 정부의 수출지원체제가 충분한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한수원이 한전 산하의 자회사로서 이 일을 감당하기 어려워 보인다. 공사로 승격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 정부의 지원도 산업통상자원부를 넘어 범정부적 지원체제를 갖춰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경주의 구멍가게 하나 없는 산기슭에 위치한 한수원이 그 일을 하기 위한 적절한 입지인가? 우수한 인재가 거기에 취직해서 일할 수 있을까? 한수원은 좋은 인재를 채용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10년이 지나 한수원이 현재와 같은 경쟁력을 가질 것을 담보하기 어렵다. 어떤 나라가 그 나라의 캐쉬카우를 그렇게 대접하겠는가? 지금은 박수를 칠 때가 아니라 상황을 예측하고 대비하여야 한다. 2024.07.22 정범진 경희대학교 원자력공학과 교수(한국원자력학회 회장)
- 미국 심장부에 ‘대한민국 모든 것’ 담다 김천수 뉴욕 한국문화원장 15년이 걸렸다. 맨해튼 중심부에 뉴욕코리아센터가 들어설 땅을 구입한 해가 2009년. 이후 설계와 시공업체 선정, 첫 삽을 뜨는 데까지 꼬박 10년이 소요되었다. 간신히 시작된 공사가 코로나19(COVID-19)를 겪으며 5년이 지난 2023년 말에 마무리되었다. 6개월 간의 시험 운영 기간을 거쳐 지난 6월 27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주재로 공식 개관 행사를 가졌다. 지난 15년은 한국인 특유의 하면 된다와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은 마음)의 정신을 잘 보여준 시간이었다. 특히 2020년대 초 팬데믹을 겪으며 K-컬처, K-아트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과 인기가 급성장한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가장 적기에 개관을 하게 된 셈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개관을 하게 된 만큼 뉴욕코리아센터를 운영하는 뉴욕문화원 모든 직원들의 감회는 남다를 수 밖에 없다. 또 뉴욕코리아센터를 뉴욕의 문화 명소로 만들겠다는 각오도 더욱 각별하고 단단하다. 뉴욕코리아센터는 맨해튼 32가에 자리한 코리아타운에서 동쪽으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오천 년 이어온 우리 문화, 예술의 역사를 도기, 자기, 나무로 상징화해 유리상자에 담아 놓은 건축디자인으로 독특하고 세련된 외관을 자랑한다. 내부에 들어서면 25m 높이의 거대한 보이드 공간이 밝고 웅장하며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내·외관이 조화를 이뤄 작지만 당당하게 세계의 중심에선 선도국가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잘 전달하는 건축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지하 2층, 지상 7층, 총 1050평 규모로 각 층마다 각기 다른 다양한 기능을 갖추고 있다. 지하는 전체가 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 1층은 대형 비디오월(Video Wall)로 둘러싸인 첨단 전시 공간, 2층은 일반 전시 공간과 우리만의 고유한 정취를 담은 정원이 있다. 3층은 한글 책을 만 여권 소장하고 있는 도서실, 4층에는 한식 조리 실습을 할 수 있는 부엌이 있다. 5층은 세미나실, 6, 7층은 사무실이다. 뉴욕은 독보적인 세계 문화, 예술의 중심이다. 전 세계 미술품 거래의 약 40%를 차지(2021년 기준)하고 링컨센터, 카네기홀 등 공연예술 기관과 공연장도 748개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또 이러한 문화, 예술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연간 6200만 명(2023년 기준)이 넘는 방문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문화, 예술 시장이 세계 최대이고 방문객이 대한민국 인구보다 많다는 것은 이들의 눈길, 발길을 잡기위한 경쟁 역시 세계수준임을 의미한다. 뉴욕코리아센터 외관 및 내부 모습(사진=문화체육관광부 제공) 이제 막 문을 연 뉴욕코리아센터가 수준 높은 문화, 예술 시설들과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뉴요커는 물론, 전세계 방문객들이 찾는 차별화된 문화, 예술 시설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친 일관된 운영 전략과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뉴욕코리아센터는 K-컬처와 아트를 바탕으로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하는 뉴욕 속 대한민국이 되어야 할 것이다. 뉴욕 속에서 한국 문화, 예술의 정수를 전달하는 장소로서 우리의 역사, 예술 그리고 생활 방식을 체험할 수 있는 원 앤 온리(OneOnly) 공간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우리 문화, 예술을 홍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 세계인이 한국을 방문하고 체험하고 싶도록 만들고 한국과 관련된 모든 상품에 대한 소비 욕구를 높이는 공간이 돼야 한다. 세계를 향해 문을 연 뉴욕코리아센터가 당면한 예산과 인력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 예술 공간으로 성장해 가기 위해서는 중장기적 관점의 운영 전략이 필요하다. 우선 문화, 예술 소비력과 전파력이 큰 20, 30대 MZ세대 동포들에게 집중하고자 한다. 뉴욕에는 전문직에 종사하며 문화, 예술에 관심이 많고 유행을 이끄는 MZ세대 동포들이 많이 있다. 특히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인동포(Korean American)들은 K-컬처와 아트를 통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일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문화정체성과 자긍심을 높여줄 수 있는 사업에 집중해야 한다. 이들을 코리아센터 활동의 핵심지지층이자 홍보집단으로 결속시켜 우리 문화, 예술이더 빠르고 넓게 미국 주류사회에 전파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MZ세대 단체들이 뉴욕문화원의 행사 기획, 운영에 참여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고자 한다. 또 코리아센터가 그들의 사랑방이 될 수 있도록 담장을 낮추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 나갈 것이다. MZ 동포세대가 코리아센터의 핵심 지지그룹으로 자리잡게 되면 K-컬처, 아트가 주류 사회에 미치는 영향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으로 전망한다. 콘텐츠 측면에서는, MZ세대가 적극 호응할 수 있고 젊고 역동적인 대한민국 이미지에 부합하는 예술, 문화 분야에 집중하고자 한다. 웹툰과 게임, 어반 아트, 비디오아트, 퓨젼 국악, K -클래식, 현대 무용, 뮤지컬, 영화 등 MZ세대의 관심이 높은 분야에 역량을 쏟고자 한다. 이들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지닌 많은 MZ세대 문화, 예술인들이 한국은 물론, 해외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K-푸드는 K-컬처확산의 핵심 분야이다. 발효 등 우리 음식이 지닌 우수성에 대한 이해와 선호도 확산은 물론, 집에서 쉽게 만들고 즐길 수 있는 생활밀착형 간편식 전파에도 집중하고자 한다. 아울러 관련 기업들과의 협력을 통해 K-뷰티, 패션 등 K-라이프스타일 확산에도 적극 나설 계획이다. 무엇보다 우리 한국인의 문화 정체성과 DNA를 이루는 핵심콘텐츠는 한글이다. 많은 2, 3세 동포들이 한국인의 정체성을 키워갈 수 있는 힘은 주말에 한국 학교에서 깨우친 한글에서 비롯된다. 한국학교와의 협력 사업을 확대하고 한글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창의적인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코리아센터 운영 방식도 과감한 변화가 필요하다.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포 문화, 예술인과 단체는 물론, 후원이 가능한 기업들까지 코리아센터 운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보완을 해야 한다.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많은 선진국들의 경우 그 국가의 문화, 예술 홍보, 지원 활동은 민간 단체의 몫이다. 이들 민간 단체는 대부분 뉴욕주에 등록된 비영리조직으로 탄탄한 동포 사회, 성공한 동포 기업, 자국 기업들의 참여와 후원으로 운영된다. 뉴욕코리아센터가 당장 민간 조직으로 전환할 수는 없겠지만, 이들 민간 비영리 조직의 운영 방식을 벤치마킹해 예산, 인력 등 시급한 부분부터 개선 방향을 찾아가야 한다. 장기적으로 코리아센터는, 국민의 세금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국가 기관에서 벗어나 현지 동포와 글로벌 기업들의 후원과 참여로 운영되는 현지 민간 조직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중·장기적인 계획 아래 이뤄져야겠지만, 코리아센터가 문을 연 지금이 논의를 시작할 적기이다. 올해는 뉴욕한국문화원이 문을 연지 45년이 되는 해이다. 가발, 섬유 제품이 수출의 전부였던 시절 문화 강국의 비전을 품고 뉴욕에 문화원을 마련한 선배님들의 천리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45년 후 뉴욕코리아센터는 어떤 모습일까? 그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뉴욕에서 대한민국을 경험하는 원 앤 온리(OneOnly) 문화, 예술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목표에는 모두 공감할 것이다. 저희 뉴욕문화원은 그 목표를 향해 오늘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뉴욕에 오면 꼭 코리아센터를 방문해보자. 여러분의 관심과 응원이 그 목표 달성을 앞당기는 큰 힘이 될 것이다. 2024.07.18 김천수 뉴욕 한국문화원장
- 키즈 물놀이시설 안전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송창영 광주대 방재안전학과 교수 키즈카페라는 용어가 익숙해지고 있는 지금, 키즈 풀빌라, 키즈 풀카페 등 새로운 유형의 시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2023년 출산율이 0.7명 이하로 떨어진 우리나라지만 키즈 관련 시설업장은 이미 동네에 하나씩은 운영되고 있으며, 주말이면 영·유아와 부모들이 가득하다. 어린 영유아 맞춤형으로 다양한 놀이 컨텐츠를 제공함과 동시에 보호자의 휴식공간을 마련해주는 키즈 관련 시설은 영유아와 보호자 모두를 만족시키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키즈 관련 시설이 활성화된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00년대 후반부터 출현하기 시작한 키즈카페는 2010년대 급격하게 증가했고, 이제는 영유아 수 대비 공급량이 수요량을 넘어서고 있다. 행정안전부는 키즈카페를 실내 공간에 관광진흥법에 따른 유기시설 또는 유기기구를 설치하거나 어린이제품 안전 특별법에 따른 어린이놀이기구를 설치하여 어린이에게 놀이를 유료로 제공하고, 어린이 또는 동반 보호자에게 식음료를 판매·제공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자의 영업소로 정의하고 있다. 키즈카페 조차 최근 법으로 정의했으며 아직까지 키즈카페에 대한 규범 표기는 부재한 실정인 와중에, 문제는 키즈 풀빌라 및 키즈 풀카페, 무인키즈카페 등 신종 키즈 시설업장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러한 키즈 관련 시설업장 중 관광진흥법에 따른 유기시설 또는 유기기구를 설치하지 않고 공간 임대업으로 영업을 하고 있다. 지난 2023년 7월 23일 인천 청라지구의 한 키즈 물놀이 시설에서 우려하던 사고가 발생했다. 키즈풀이라는 업장에서 2살 여아가 유아용 수영장에 빠져 익사한 것이다. 해당 사업장은 깊이 67cm의 유아용 수영장을 설치하고, 사전예약을 통해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들어가는 무인운영형태의 공간 임대업장이였다. 당연히 안전요원은 부재한 상태였으며, 안전요원 배치에 대한 법적 의무조차 없는 사업장이었다. 유원시설도 아니고, 식품접객업도 아니며, 물놀이형 어린이놀이시설 조차 해당하지 않았다. 또한 비영리 공간 임대업으로 신고함에 따라 안전관리에 해당한 어떠한 법적 허가 및 점검, 관리 등의 의무에서 벗어나 완벽한 사각지대를 만들었다. 그 공간에서 무고한 여아가 사망했으나 사업주를 포함한 모두가 형사적 책임 대상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를 개선하고자 행안부는 지난 5월 2024년 어린이 안전 시행계획을 통해 상반기 내에 무인키즈카페 등 신종·유사 놀이시설에 대한 안전관리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하반기가 시작되고 무더위로 인한 물놀이 시설이 개장되고 있는 현재까지 정부의 대책은 시행되지 않고 있으며, 어떠한 대책이 마련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공간 임대업으로 신고한 키즈풀 시설은 여름철을 맞이해 성황을 이루고 있으며, 올 여름 현상유지가 지속된다면 또 다른 어린이 물놀이 사고는 예정된 수순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정부는 조속히 신종·유사 물놀이 시설에 대한 안전관리 대책을 마련하여 시행해야 한다. 현재 신종·유사 놀이시설은 일반음식점, 장소대여업, 관광펜션, 농어촌민박 등 다양한 업종으로 등록되어 있어 안전기준 및 대처방안에 대한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특히 어린이와 함께 사용하는 물놀이 시설에는 생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에 따라 업종에 상관없이 모든 물놀이 시설에 적용 가능한 안전 및 위생 가이드라인 등을 마련해 적용해야 한다. 또한 응급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각 시설별로 구축하도록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워터파크 및 해수욕장 등은 응급상황 발생 시 신속한 대처가 가능하도록 응급구조요원이 상시 배치되어 있으나 풀빌라나 키즈풀펜션 등 소규모 시설에서는 응급구조요원 배치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어린이가 이용하는 시설에서는 신속한 인명구조가 중요하므로, 공개된 장소에서는 정부, 지자체, 민간이 협약을 통해 응급구조 요원 상시 배치 및 순찰, 정기적인 점검 등이 필요하다. 인력 투입이 어려운 개인 공간은 반드시 인근에 구명 장비를 비치하도록 안전규정을 강화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용자들의 안전의식을 높이는 것이다. 대규모 물놀이 시설뿐만 아니라 소규모 시설에서도 관리책임자는 반드시 물놀이 안전수칙을 사전에 공지하고 현장에서 안전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또한 유아 및 어린이의 보호자들이 어린이 물놀이에 대한 유의점과 안전수칙을 숙지할 수 있도록 정형화된 교육체계가 필요하다. 이와 같은 최소한의 정책방안이 시행되어야 신종·유사 키즈 물놀이 시설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 유아 및 어린이 물놀이 사고는 누군가 하나의 책임이 아닌 공동의 책임이 있다. 제도적 사각지대에 대한 정부, 안전의식이 부족한 사업주, 가장 가까이에서 보살펴야 할 보호자 등 우리 미래에 주역이 되는 아이들의 안전은 국가와 국민이 책임감을 갖고 지켜내야 하는 최우선이다. 아이들의 안전한 물놀이를 위해 제도적·문화적·사회적 관심이 절실하다. 2024.07.16 송창영 광주대 방재안전학과 교수
- 변화하는 세계질서와 동맹: 2024 나토정상회의 의미 박원곤 이화여자대학교 통일학연구원장 미국 정부가 2022년 10월에 국가 대전략을 담은 최상위 문서인 국가안보전략서(National Security Strategy)를 발간하자 세계는 충격을 받았다. 탈냉전이 확실히 종식되고 주요 강대국간 경쟁이 심화되는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라는 주장 때문이다. 1945년 이래 미국의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국제질서를 구축한 후 소련과의 냉전에서 승리하고 사실상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으로 자리한 탈냉전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향후 10년이 세계질서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가 될 것임을 적시했다. 미국 정부가 이러한 세계질서 변화를 천명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2022년 2월 24일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가 감행한 우크라이나 불법 침공이다. 이 전쟁은 1945년 유엔이 성립되면서 전쟁을 막고 번영을 추구하기 위해 거부권과 핵무기 독점권이라는 절대 권한을 준 5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중 하나인 러시아가 인접 주권국가를 영토 합병을 목적으로 무력 침공한 첫 사례이다. 이후 세계는 하마스의 무자비한 이스라엘 민간인에 대한 테러와 이에 대응하는 이스라엘의 무차별적 공세를 목격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불법행위로 국제사회에 제재를 받는 북한과 러시아가 냉전 시기인 1961년 체결하였다가 폐기된 동맹조약을 사실상 부활하는 퇴행적 행보를 감행했다. 더불어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 시기인 2018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미국과 중국간 전략적 경쟁도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의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할 때 미 국가안보전략서가 공포한 탈냉전의 종식은 안보와 번영을 위해 구축한 기존 질서 부정으로 이해된다. 더불어 올 11월 미국 대선에 자국 우선주의를 주창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귀환 가능성이 커지면서 불확실성이 더 증폭되고 있다. 규범에 기초한 국제질서 회복이곧 국익 이러한 엄중한 상황에서 7월 9일부터 11일(현지시간)까지 미국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나토정상회의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도 인도·태평양의 미국 핵심 동맹국 4개국(Indo-Pacific 4: IP-4)의 일원으로 3년 연속 참여하였다. 이번 회의의 가장 큰 성과는 이른바 규범에 기초한 국제질서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고 여기에 도전하는 세력을 명확히 규정하며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가 마련된 것이다. 규범에 기초한 국제질서는 주권존중, 자유무역, 법치, 힘을 통한 현상 변경 반대, 항행의 자유, 핵 비확산, 국제법 존중, 대화와 협상을 통한 분쟁 해결 등 한국이 안보를 보존하고 번영을 이룬 기본 원칙이다. 이러한 가치를 공유하는 유사국가(like-minded countries) 36개국이변화하는 세계정세에 방향타를 확실히 하고 대응하자며 힘을 합친 것이다. 한국의 관점에서 볼 때 향후 책임이 커지지만, 한국의 안보와 번영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모였다. 우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불법 침공에 대한 공동 대응을 구체화하였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해 수차례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것을 고려하여 우크라이나를 위한 나토 안보 지원 및 훈련 기구(NSATU) 설립에 합의하고 2025년 최소 400억 유로(약 60조원) 규모의 군사 장비·훈련을 약속했다. 한국도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는 나토 신탁기금을 올해 1,200만 달러(약 165억원)에서 내년 2,400만 달러(약 331억원)로 두 배 증액하기로 공약했다. 한국이 우크라이나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확인된다. 북한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 수행을 위한 물자를 지원하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러시아와 사실상의 동맹조약을 체결하면서 다양한 지원을 받고 있다. 특히 한국에 실존적 위협이 되는 주요 무기 체계 및 핵심 군사 기술 이전 가능성도 여전히 배제하지 못한다. 북한이 지난 두 차례 발사한 군사정찰 위성은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협력했음이 확인된다. 일부에서는 한국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국제사회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유화적인 대러 정책을 취했다면 러시아가 북한과 협력을 제한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한다. 그러나, 북한이 제공하는 포탄과 탄도미사일이 절실한 러시아는 한국의 태도와 상관없이 북한과 협력을 강화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이를 통해 한국은 두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유럽에서 발생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반도 안보 상황과 직접 연계된다는 것과 북러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는 한 협력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나토 동맹국과 협력하여 무력에 의한 영토변경 반대라는 국제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국익이다. 유럽의 안보와 아시아의 안보, 동전의 양면성 나토 국가는 인도·태평양 지역 안보에 더욱 관심을 두고, 인태 4개국과 협력을 강화할 것임을 천명했다. 워싱턴선언으로 명명되어 발표된 총 38개 항의 나토 공동성명 중 인태지역과 협력 강화도 포함되었다. 나토와 인태 4개국은 우크라이나, 사이버안보, 허위정보, 기술 등의 분야에서 공동대응하고 나아가 해양안보, 비확산, 대테러 분야 등으로 확장하려 한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월터 E. 워싱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 4개국(IP4) 정상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 대통령, 크리스토퍼 럭슨 뉴질랜드 총리, 기시다 일본 총리, 리처드 말스 호주 부총리 겸 국방장관. (대통령실 홈페이지) 지난 3년 회의 중 처음으로 인도 태평양과 유럽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저해하는 러-북 간 불법 군사협력을 강력히 규탄한다라는 내용도 담았다. 나토와 인태 국가 협력은 미국이 주도하여 구축 중인 통합억제(integrated deterrence)의 일환이다. 2022년 미 국방전략서가 공식화한 통합억제는 대서양의 나토 동맹국과 인태 지역의 미국 핵심 동맹국을 연맹(federate)하여 대비태세를 강화하는 것이 골자이다. 풀어쓰면 유럽 혹은 인태 지역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 36개국이 힘을 합쳐 공동대응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통합억제가 발전하면 북한에 대한 억제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다. 북한은 한미일 외에도 나토 국가가 포함된 거대한 군사 협력체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 수 있다. 일부에서 한국의 동참이 통합억제가 목표로 하는 주 대상인 중국 견제로 연계되어 부담이 클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한다. 그러나,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부장관과 람 이매뉴엘 주일 미국 대사 등이 공개적으로 밝힌 것처럼 미국이 동맹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환(major transformation)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불참하거나 거리를 두는 것은 사실상 선택지가 아니다. 한국이 동참을 거부한다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이 훼손되며 동맹구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홀로 남기가 된다. 한국은 북한과 같이 철저히 독립적인 주체를 내세워 외세를 배제하고 자력갱생을 통해 고난의 행군을 하는 비정상 국가가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회의에서 밝힌 윤석열 대통령의 유럽의 안보와 아시아의 안보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라는 인식은 맞다.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허울을 쓰고 수동적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한국은 세계 10위 내에 드는 군사력과 10위권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가치를 공유하며 기존 질서를 유지코자 하는 35개국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규범에 기초한 국제질서를 수호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 북한도 동 질서에 동참토록 하는 것이 한국이 나아갈 방향이다. 2024.07.15 박원곤 이화여자대학교 통일학연구원장
- 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된 아프로비트의 선구자 아프리카의 토착적 리듬과 서양의 대중 음악 문법이 뒤섞인 아프로비트(Afrobeat)는 1960년대 무렵 아프리카에서 등장했고 이후 본격적으로 서양의 청취자들을 만났다. 거칠게 말하면 이는 가나의 하이라이프, 요루바의 폴리리듬, 그리고 제임스 브라운의 훵크가 합성된 것처럼 보였다. 미국의 흑인들에 의해 태어난 블루스, 프리 재즈, 그리고 소울과 훵크 등을 다시금 아프리카 대륙으로 가져와 새롭게 아프리카 식으로 해석한듯 보였던 아프로비트는 아프리카의 대중음악으로 시작해 또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는 이후 미국의 흑인 음악인들은 물론 폴 사이먼과 데이빗 번 같은 이들 또한 사로잡았다. 그 밖에도 폴 매카트니와 마일스 데이비스, 켄드릭 라마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면서 아프로 비트는 시대를 불문하고 뿌리내려갔다. 펠라 쿠티 뮤지컬 (사진=펠라뮤지컬 페이스북) 1960년대 무렵,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이 정치적으로 독립하면서 아프리카 전역의 밴드 리더들 또한 자신들의 민속음악을 편곡하는 식으로 레퍼토리를 수정했다. 이미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자신들을 점령한 서구의 악기들을 호텔과 클럽 등지에서 연주해왔는데, 서구인들이 만든 정치적 제약이 없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스스로의 뿌리를 탐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발생한다. 그 중심에 펠라 쿠티가 있었다. 나이지리아 출신의 이 도발적인 예술가이자 민권운동가는 국제적 주목을 받으면서 아프로비트를 세계의 중심으로 끌어 올렸다. 그는 요루바어와 뒤섞인 영어로 도전적인 메시지를 외치는 한편 최면적인 편곡과 리듬을 운용해내면서 급진적인 문화현상을 만들어 나갔다. 무엇보다 1960년대 당시 나이지리아 군사 정부를 맹렬히 비판하면서 식민지 이후 부패한 나이지리아 정권에서는 가시 같은 존재처럼 여겨졌다. 펠라 쿠티는 교사 연합을 설립한 성공회 목사였던 아버지, 레닌 평화상을 수상한 민족주의자이자 인권 및 노동 운동가였던 어머니 아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참고로 펠라 쿠티의 형제들은 모두 의사가 됐다. 펠라 쿠티는 어린시절부터 피아노와 타악기 레슨을 받았고 1959년 무렵 영국 런던에서 클래식 음악을 공부했다. 런던에서 재즈, 그리고 록 밴드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다양한 스타일을 접한 펠라 쿠티는 1960년대 중반 나이지리아로 돌아와 런던에서 공부했던 것을 토대로 아프로비트 사운드를 실험한다. 1969년 미국 투어 이후, 미국에서 지켜본 말콤 엑스와 블랙 팬더 및 기타 흑인 무장 세력들에게서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펠라 쿠티의 음악 또한 정치적으로 변해간다. 다국적 기업, 그리고 서구문명이 아프리카를 착취하는 방식에 대한 개탄을 음악으로써 정리해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의 히트곡들인 Zombie, Monkey Banana, Beasts of No Nation, 그리고 Upside Down 등은 여러모로 사회 변화를 촉구했다. 마치 주술사처럼 노래하며 키보드 위에서 몸을 흔드는 이 선동적인 가수는 무직자, 불우한 계층, 그리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음악적으로도 놀라운 성취를 거둠과 동시에 1970년대부터는 정치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음악적 재능을 정치적인 저항의 도구로 활용한 펠라 쿠티는 자신에게 있어 음악이란 권위와 식민지화, 그리고 부패한 아프리카 정부에 대항하는 유일한 무기라고 말했던 바 있다. 펠라 쿠티는 자신만의 칼라쿠타공화국을 세웠다. 라고스 교외에 위치한 칼라쿠타 공화국에는 녹음 스튜디오는 물론 소외된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거대한 단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존재 자체가 불법이었고 집단의 몇몇 지나치게 자유로운 정책들은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대체로 이는 군사정권에 대한 일종의 저항 행위로 읽혔다. 1979년도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보기까지 했다. 소외된 사람들의 대변인이고 군사 독재에 맞서 직접 몸을 던졌지만 대신 매우 큰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자신의 정치적 행보 때문에 펠라 쿠티는 평생 군부로부터 직·간접적인 억압을 받았다. 군부는 그의 추종자들까지 체포하고 구타했으며 투옥할 이유를 만들기 위해 공연장을 정기적으로 급습했다. 주로 저녁시간에 습격을 받았기 때문에 결국 아침에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꼬투리를 잡혀 몇번의 징역 생활을 했음에도 정치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심지어는 살인 혐의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이 역시 결국 기각됐다. 1977년, 군부의 명령을 받은 약 1000명의 군인이 펠라 쿠티의 공동체 칼라쿠타 공화국을 습격하면서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진다. 마을의 집들이 불태워졌고 펠라 쿠티의 어머니는 머리채를 잡힌 채 건물 2층 창문 밖으로 던져지면서 그로 인한 부상 및 후유증으로 이후 사망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펠라 쿠티의 드러머 토니 앨런은 이 습격 이후 자신은 음악가일 뿐 싸움꾼이 되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며 팀을 나갔다. 이처럼 군사정권이 탄압의 강도를 높였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음악이 어떤 정치인의 수사보다도 강력했음을 입증해주는 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1997년 8월 2일, 펠라 쿠티가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그의 사망은 아프리카 대륙에 에이즈에 대한 인식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펠라 쿠티는 칼라쿠타 공화국 안에서 27명의 아내와 결혼한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결국에는 모든 여성과 이혼하면서 어떤 남자도 여성의 몸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 말하기도 했다. 에이즈로 사망하는 날까지 그는 다양한 사안들과 끊임없이 투쟁해왔다. 사망 이후에도 펠라 쿠티의 음악적 유산들이 이어져 나갔다. 일단은 아들들인 페미 쿠티와 세웅 쿠티에 의해 이 횃불이 계승되었다. 몇 주 전 열린 콜드플레이의 글래스톤베리에서의 공연에서 페미 쿠티가 게스트로 등장해 Arabesque를 연주하기도 했는데, 페미 쿠티는 자신의 아들 메이드 쿠티와 함께 발매한 더블 앨범 Legacy+로 그래미 글로벌 뮤직 부문 후보에 지명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여러 밴드 중 하나인 이집트 80을 이어 나가고 있는 세웅 쿠티 또한 2018년 자신의 앨범 Black Times로 월드뮤직 부문 그래미 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들은 문화 지도자로서 여전히 쿠티 가문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말 그대로 펠라 쿠티의 음악은 전 세계에 퍼져 있다. 그의 유산은 아프로비트를 통해 살아 있으며 이는 나이지리아 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 브라질, 일본 등지에서도 열렬히 흡수되어 갔다. 그의 유산을 있는 그대로 이어 나가는 수많은 아프로비트 뮤지션들은 물론 비욘세와 제이콜, 나스, 제이지 등의 힙합 아티스트들 또한 그의 음악을 샘플링하기도 했다. 정작 펠라 쿠티는 1984년 인터뷰에서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로 헨델을 꼽았다. 펠라 쿠티의 전기를 그린 뮤지컬 Fela! 또한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시작해 브로드웨이로 넘어가면서 예상치 못한 화제를 불러 일으키며 극찬 받았다. 뮤지컬은 다수의 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살아있는 동안 미국을 정복하지 못했던 펠라 쿠티는 마침내 미국의 문화적 중심지로 옮겨져 적극적으로 인정받았다. 한없이 자유분방하면서 뼛속까지 깃들어 있는 그 강렬한 리듬은 펠라 쿠티의 사운드를 쉽게 거부할 수 없게끔 만든다. 그리고 소외된 아프리카 사람들은 기이한 힘을 감지하고는 펠라 쿠티에게로 편승했다. 자신의 두 형제들처럼 의료업에 종사하면서 고고한 삶을 영유할 수도 있었겠지만 펠라 쿠티는 목숨을 걸고 저항하면서 악명을 떨치는 방향을 택한다. 결코 타협하지 않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위험한 이 인물은 이 세상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고귀한 흔적을 남긴다. ☞ 추천 음반 ◆ Zombie (1977 / Coconut) 가장 널리 알려진 펠라 쿠티의 앨범으로 앨범에 수록된 네 곡이 모두 10분 이상의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다. 군사정권이 시키는 대로 사고방식을 조종당하는 것에 대해 펠라 쿠티는 마치 좀비 같다 생각했고 결국 이런 작품으로까지 이어졌다. 펠라 쿠티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당시 국가 원수 올루세군 오바산조 장군에게 이 앨범은 일종의 트리거처럼 작용했고, 결국 앨범이 공개되고 나서 얼마 후 1000명의 군인을 칼라쿠타 공화국으로 투입시키면서 구역을 피로 물들인다. ◆ Red Hot + Riot: The Music and Spirit of Fela Kuti (2002 / MCA) 에이즈에 대한 인식 및 활동 기금 마련 컴필레이션 시리즈로 널리 알려진 레드 핫에서 에이즈로 사망한 펠라 쿠티를 테마로 앨범을 만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디안젤로부터 믹스마스터 마이크, 탈립 콸리부터 조르쥬 벤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언급하기도 어려운 30여명의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2000년대 초반 흑인 음악, 재즈, 아프로비트의 현주소, 그리고 펠라 쿠티의 영향을 동시에 추적해내고 있다. ◆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다수의 일간지 및 월간지, 인터넷 포털에 음악 및 영화 관련 글들을 기고하고 있다. 파스텔 뮤직에서 해외 업무를 담당했으며, 해외 라이센스 음반 해설지들을 작성해왔다. TBS eFM의 On the Pulse 음악 작가, 그리고 SBS 파워 FM 정선희의 오늘 같은 밤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록밴드 불싸조에서 기타를 연주한다. samsicke@hanmail.net 2024.07.15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
- 슈만의 교향곡에 투영된 라인 강과 쾰른 대성당 독일의 젖줄인 라인 강. 이 강은 로마제국 시대에 제국의 북쪽 국경선으로 문명세계 로마제국과 비문명세계 게르마니아(Germania)를 나누던 경계선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라인 강 주변에는 그 기원이 로마제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도시가 상당히 많다. 그중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라인 강 하류에 위치한 쾰른이다. 라인 강. 오른쪽에 쾰른 대성당의 실루엣이 보인다. 쾰른의 기원은 기원전 38년 로마군이 세운 군단기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후 1세기 초, 로마제국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이자 뛰어난 장군이었던 게르마니쿠스는 이곳에 주둔하면서 강 건너편의 게르만족과 대치했는데, 그의 딸 아그리피나는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나중에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황후가 되어 서기 50년에 이곳을 식민도시로 격상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이곳은 아그리피나의 식민도시라는 뜻으로 콜로니아 아그리피넨시스(Colonia Agrippinensis)라고 불리게 되었다. 쾰른(Kln)이란 지명은 바로 식민지란 뜻의 콜로니아에서 유래한다. 한편 프랑스 사람들은 이곳을 콜로뉴(Cologne)라고 하고 영어권에서는 이 표기를 그대로 따른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 쾰른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따라서 시내 곳곳에서 로마제국 시대의 유적을 볼 수 있다. 쾰른에서 볼 수 있는 아그리피나의 석상. 쾰른 가까이에 위치한 라인 강변의 주요 도시로 본(Bonn)과 뒤셀도르프(Dsseldorf) 를 꼽을 수 있는데, 본은 쾰른처럼 2000년 전에는 로마제국의 도시였던 반면 뒤셀도르프는 몇몇 게르만 부족이 살던 조그만 마을이었다. 본과 뒤셀도르프라면 각각 대음악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고향,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1856)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 라인 강, 쾰른, 뒤셀도르프, 본이라면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 북동부의 주요도시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과 가까운 소도시 츠비카우 태생의 슈만은 30세 때인 1840년에 하이네의 서정적인 간주곡(Lyrisches Intermezzo)에서 16개 시를 발췌하여 연가곡 시인의 사랑을 작곡했는데 그중 여섯 번째 곡이 라인에서, 거룩한 흐름에서(Im Rhein, im heiligen Strome)이다. 라인 강과 쾰른 대성당. 슈만은 드레스덴에서 활동하다가 뒤셀도르프시의 음악감독으로 초빙을 받아 40세가 되던 해인 1850년에 가족과 함께 뒤셀도르프로 이주했다. 그는 하이네의 시 라인에서, 거룩한 흐름에서에 묘사된 쾰른 대성당을 실제로 보고 싶어서 그해 9월 후반에 쾰른으로 여행했다. 그 후 그는 다시 한번 쾰른을 비롯한 라인지방으로 여행하게 되는데 여행에 앞서 11월 2일에 새로운 교향곡의 1악장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12월 9일에 교향곡 전체를 완성했다. 이것이 바로 교향곡 3번, 일명 라인 교향곡이다. 라인이란 별칭은 그가 붙이지 않았지만, 그는 이 교향곡을 작곡하던 중 고결한 라인 강과 사람들의 역사와 정기가 나의 마음속을 스쳐 흐르고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이 작품은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처럼 다섯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시각적인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사실 슈만은 처음에 2악장을 라인의 아침이라고 제목을 붙였다가 출판할 때는 이를 없앴지만 이 악장은 라인 강의 흐름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가 하면 4악장은 쾰른 대성당의 장엄함과 종교의식의 엄숙함을 연상하게 한다. 쾰른 대성당 내부. 쾰른 대성당이라면 전통적인 중세 석조건축 시공기술의 한계를 뛰어넘은 고딕 건축의 가장 훌륭한 예 중 하나로 손꼽히는데 고도(古都) 쾰른의 심장 중의 심장이며 쾰른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랜드마크로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양식상으로 보면 프랑스식 고딕양식이다. 독일어로는 쾰르너 돔(Klner Dom, 쾰른 대성당)이라고 한다. 독일어 돔(Dom)은 라틴어로 집을 뜻하는 도무스(domus)에서 어미 -us를 뺀 형태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를 두오모(Duomo)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집은 신의 집이란 의미이다. 대성당 정면은 서쪽을 향해 있고, 신앙과 영성을 상징하는 높은 첨탑 두 개가 하늘에 닿으려는 듯 높은 곳을 향하여 솟아 있다. 탑의 높이는 157m. 509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첨탑 위 전망대에서 시가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이 웅대한 대성당은 1248년에 착공되었다. 하지만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고 여러 차례 중단되다가 1560년에는 완전히 중지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거의 300년이 지난 1842년,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을 주도하면서 상징적인 건축물이 필요했기에 다시 공사를 시작했다. 다행히도 분실되었던 중세의 설계도가 당시에 우연히 발견되어 원래 계획한 형태대로 전통적인 중세 시공방식에 따라 공사하여 마침내 1880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니까 슈만이 1850년에 교향곡 제3번 라인을 작곡할 때 대성당은 아직 미완공 상태였던 셈이다. 한편 슈만은 이 교향곡을 작곡한지 6년이 지난 1856년 7월 29일에 본(Bonn) 외곽의 엔데니히 정신병동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시신은 본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culturebox@naver.com 2024.07.11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 여름날의 열정과 싱그러움을 주는 클래식 음악 장마와 무더위가 지속되는 여름이다. 높아지는 습도와 불쾌지수는 정신적인 피로도를 쌓이게 하며 우리를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여러 문인과 시인들은 사계절 중 여름을 가장 싱그러우며 젊음을 상징하는 계절로 표현하고 있다. 미국작가 멜리사 머(Melissa Marr)는 기뻐하라! 여름이 그 생명력으로 슬픔을 몰아내리니라고 하며 여름을 찬양하고 있고, 또 다른 작가 린다 블렉(Linda Bleck)은 여름을 향기, 맛, 소리 그 모든 것 피어나는 감각의 축제로 묘사하고 있다. 많은 예술가들에게 여름은 이렇듯 다양한 영감과 에너지를 주고 있다. 아래 작품들은 여름을 주제로 작곡한 작품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여름날의 열정과 싱그러움을 주는 곡들이라 느껴진다. 날씨에 지친 마음을 음악을 통해 다시 충전하길 바라며 아래 작품들을 소개해 본다. ◆ 멘델스존 - 한 여름 밤의 꿈 영국의 셰익스피어가 엘리자베스 1세 시대 쓴 습작이자 전기작품 한여름 밤의 꿈은 그의 5대 희극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영화로도 제작되어 1935년도에 워너사에서, 1999년도에 폭스사에서 제작되었다. 두 작품 모두 영화사에 남을만한 예술적인 작품인데 특히 1999년도 배우진은 캐빈 클라인, 미셸 파이퍼, 소피마르소 등으로 화려하다. 두 작품의 배경음악에는 멘델스존의 음악이 타이틀 음악으로 쓰였는데 바로 그의 한여름 밤의 꿈 서곡과 모음곡이다. 1935년도와 1999년도 영화의 첫 장면은 바로 멘델스존의 서곡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그는 이 작품을 17세의 어린 나이에 완성했다. 괴테로부터 모차르트 이후 최고의 천재라는 극찬을 받은 그는 부유했던 가정 환경 덕분에 음악 이외에도 문학과 미술, 언어 등 여러 인문예술분야에 재능이 넘쳤다. 서곡은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환상적이고 동화적인 느낌을 주고 있으며 존경하는 바흐의 화성과 선율을 낭만파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슈만은 이 곡을 듣고 마치 요정들이 직접 연주를 하고 있는 듯하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웨딩마치를 비롯한 서곡 이외의 작품들은 17년 후인 34세에 프로이센의 국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Friedrich Wilhelm IV)의 부탁으로 여러 개의 극음악을 덧붙여 완성되었다. 청소년들이 들려주는 한여름밤의 선율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레스피기 - 로마의 소나무 피톤치드를 뿜어내는 여름 소나무 숲은 청량감으로 가득하다. 이탈리아 작곡가 레스피기는 소나무에 영감 받아 로마의 소나무 연작을 작곡했다. 로마의 소나무는 레스피기의 로마시리즈 중 하나로 첫 번째 작품인 로마의 분수와 마지막 작품인 로마의 축제 사이에 작곡되었다. 보통 이탈리아 작곡가는 푸치니와 베르디, 벨리니등 오페라로 유명한 편이지만 레스피기는 관현악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편이다. 그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에 능통했으며 러시아 작곡가 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 작곡법을 수련 받았는데, 그의 작품에는 스승의 선율적인 느낌이 종종 보여지고 있다.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의 교수로 로마에 이주한 레스피기는 로마에 대한 아름다움과 애정을 드러냈는데, 로마의 소나무는 도시의 유서 깊은 장소와 소나무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 곡은 전체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보르게제 저택의 소나무, 2부는 카타콤베 부근의 소나무, 3부는 지아니콜로의 소나무, 마지막 4부는 아피아가도의 소나무다. 오케스트라 편성에는 글로켄슈필, 첼레스타, 물피리, 축음기등 생소한 악기들도 등장해 작품의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작품은 현실세계 로마 소나무를 묘사한 것이 아닌 고대와 중세를 지배했던 로마 황금기 시절을 함께 한 소나무를 통해 상상력과 향수를 자극했다고 볼 수 있다. ◆ 베토벤 - F장조 로망스 2번 베토벤은 두 개의 아름다운 바이올린 로망스 작품을 남겼다. 그 중 2번 F장조는 처음부터 등장하는 아름다운 바이올린 멜로디로 로맨틱함을 표현하고 있다. 로망스는 그 기원을 시에서 찾을 수 있으며 중세 음유시인 트루베르, 트루바두르를 통하여 유럽에 전파된 서정적인 가곡이다. 이후 아름답고 감상적인 멜로디의 기악곡에도 로망스라는 장르를 붙이기 시작하면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베토벤의 로망스 2번은 1번보다 멜로디적인 느낌이 훨씬 더 느껴지는데, 사실 1번보다 앞서 작곡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학자들 사이에 로망스 2번은 그의 협주곡 느린 악장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추측도 있다. 작품은 따뜻함과 낭만주의가 베토벤 특유의 숭고하면서도 순수함 그리고 로망스의 달콤함이 적절히 어우러져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우울하며 슬픈 듯한 뉘앙스도 풍기고 있는데 아마도 그 시절 베토벤의 심리상태가 반영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작품이 완성된 1798년도에 베토벤은 자신의 청각장애를 자각하고 있었으며 이명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1년 뒤인 1799년에는 브룬스비크 백작의 딸 조세핀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마도 이런 이유가 그의 로망스가 바로 출판되지 않고 시간이 지난 후 출판된 연유이지 않을까 싶다. 베토벤의 로망스는 멜로디의 인기에 힘입어 발레작품으로 초연(1989 뉴욕시티 발레단)되기도 했으며, 작품의 친필 원고는 현재 미국의회 도서관에 보관되어있다. ◆ 로드리고 - 아랑훼즈 협주곡 지금 중년 이후의 세대들은 어린 시절 토요 명화와 주말의 명화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시절 어린이들은 영화를 보다가 결국 끝까지 못보고 잤던 추억을 갖고 있을 듯하다. 당시 주말의 명화의 타이틀 음악은 영화 영광의 탈출(Exodus)의 OST였고 토요명화는 스페인 작곡가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 2악장이었다. 스페인은 종종 위대한 예술가들이 태어나고 활동하는 나라다. 건축의 가우디를 비롯해 화가로는 벨라스케즈, 엘 그레코, 고야, 피카소, 미로 등 쟁쟁하다. 음악가도 불세출의 스타들이 많이 등장했다. 바이올리스트 사라사테,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등이 있다. 기타 분야는 타레가, 세고비아 등 대가들이 넘쳐나는데 스페인의 국민악기가 바로 기타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타는 8세기 스페인을 지배했던 무어인들이 가져온 악기라고 알려져 있다. 즉 오랜 세월 그들과 함께 한 악기라는 뜻이다. 아마도 기타에서 느껴지는 화려한 음색과 쓸쓸함이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굴곡진 스페인 역사와 국민들의 정서와 잘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작곡가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은 세계 2차대전을 목전에 둔 1939년 파리에서 작곡되었으며 이듬해 마드리드에서 초연되었다. 아랑훼즈란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72㎞ 떨어진 지방도시로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여름 궁전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로드리고는 영감을 받아서 신고전주의 형식의 낭만적인 협주곡을 완성했다. 특히 2악장 멜로디의 동양적이며 신비로운 선율과 서정성 때문에 유명 재즈아티스트와 크로스오버 음악가의 작품에도 자주 편곡되어 연주되고 있다. ◆ 글라주노프 - 발레 사계中 여름 사계는 여러 작곡가들의 소재다. 널리 알려진 비발디를 비롯해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차이코프스키와 현대 작곡가 막스 리히터도 작품의 소재로 사계를 사용했다. 여기에 한 명 더 추가하면 러시아 작곡가 글라주노프도 사계 작품이 있다. 글라주노프의 사계는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레이몬다와 함께 대표적인 발레작품이다. 사계절을 의인화해 표현한 그의 발레작품 사계는 전체 4막으로 1막이 봄이 아닌 겨울로 시작해 4막 가을로 끝난다. 생명을 준비하고 추위를 이겨내야 하는 가혹한 계절을 시작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가을로 끝나는 것이 극의 전개에 더 어울릴 것이라 판단했던 듯 하다. 작품은 1899년 20세기를 목전에 두고 완성되었으며 초연은 차이코프스키와 함께한 전설적인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와 함께 했다. 초연 당시는 크게 호응 받지 못했으나 이후 대표적인 글라주노프의 작품으로 사랑 받았으며 차이코프스키의 발레작품처럼 모음곡으로 만들어져서 종종 연주되고 있다. 그 중 3부 여름은 따뜻함과 풍요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왈츠와 뱃노래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선율로 시작하는 여름은 장미와 새를 표현하는 춤곡이 등장하고 더위에 젖은 국화, 곡식 등을 위해 물의 정령이 물을 가져다 주며 휴식을 주는 내용이다. 특히 신화 속 정령인 사티로스등이 등장하며 목관악기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글라주노프는 어린 시절 모차르트의 재림으로 신동으로 불렸었다. 하지만 이후 음악적 행보는 혁신적이기 보다는 시대조류에 편승했으며 후에 굉장히 보수적 색채를 띄게 되었다. 이런 특성은 그의 작품에도 잘 나타나있는데, 멜로디 면에서는 차이코프스키의 후계를 자처하고 있고 형식적으로는 고전적 측면이 강하다 할 수 있다. 사계는 그의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계절의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 음반추천 멘델스존의 한 여름밤의 꿈은 보스톤 심포니와 세이지 오자와의 지휘, 주디 덴치의 나레이션 음반을 추천한다. 레바인의 음반도 활기차고 에너지 넘친다. 레스피기의 로마의 소나무는 다니엘 가티 지휘의 산타 체칠리아 관현악단의 연주와 로린 마젤과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음반을 추천 드린다. 프리츠 라이너의 올드레코딩도 좋다. 베토벤의 로망스 2번은 요한나 마르치의 고상한 연주와 아르투르 그뤼미오의 기품 있는 명연, 그리고 토마스 체트마이어의 개성 넘치는 연주도 들어보시길 권하겠다.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은 나르시소 예페스의 연주가 널리 알려져 있다. 괴란쉘셔와 오르페우스 챔버오케스트라가 함께한 음반도 추천 드린다. 전설적인 재즈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의 편곡연주도 신선하다. 글라주노프의 사계는 러시아 지휘자인 스베틀라노프의 음반과 아쉬케나지의 음반을 추천한다. ◆ 김상균 바이올리니스트서울대 음대 재학 중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비엔나 국립음대와 클리블랜드 음악원 최고연주자과정 최우수 졸업. 이 후Memphis 심포니, Chicago civic오케스트라, Ohio필하모닉 악장 등을 역임하고 London 심포니, Royal Flemisch 심포니 오디션선발 및 국내외 악장, 솔리스트, 챔버연주자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eigenartig@naver.com 2024.07.10 김상균 바이올리니스트
- 대한민국의 안보 지평 넓힐 성과 기대한다 문성묵 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 윤석열 대통령은 7월 10일부터 11일까지 미국에서 열리는 2024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한다. 방미 기간 중 10일에는 체코,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등 5개 이상의 나토 회원국들과 연쇄 정상회담을 갖고 양자 간 현안과 지역 및 국제정세에 관해 논의한다. 10일 저녁에는 정상회의 개최국인 바이든 대통령 부부가 주최하는 친교 만찬에 참석하며, 11일 오전에는 나토의 인도·태평양 4개국 파트너(IP4)인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정상회의에 참석한다. 11일 오후 윤 대통령은 나토 퍼블릭포럼에 참석해 인도·태평양 세션의 단독 연사로 나선다. 이번 회의 참석은 한반도 평화·안정을 위한 안보협력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목적이다. 이에 앞서 8~9일 하와이 미 인도·태평양 사령부 방문 등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일정도 소화한다. 나토 즉, 북대서양조약기구는 냉전이 시작된 1949년 4월 4일 안전보장조약인 북대서양조약에 의해 탄생한 북미와 유럽 등 서방국가들의 군사동맹이다. 본부는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위치하고, 수장은 북대서양조약기구 사무총장으로 현임 사무총장은 옌스 스톨텐베르그이다. 나토 회원국은 미국, 영국, 캐나다를 비롯하여 2024년에 가입한 스웨덴까지 32개국이다. 나토정상회의는 나토 회원국 정상들이 만나 회원국의 공동안보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체이다. 대한민국은 2022년 6월 스페인 마드리드 회의에 처음 초청받았고 올해로 3년 연속 회의에 초청받았다. 나토는 창설 이후 유럽 안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2차 세계대전 직후 공산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동유럽 국가들이 탈냉전 이후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자국 안보를 위해 나토 가입을 희망하면서 점차 확장되었다. 특히,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오랫동안 중립국 지위를 유지해 왔던 핀란드와 스웨덴마저 위협을 느껴 각각 나토에 가입했다. 만일 우크라이나가 나토 회원국이었다면 러시아의 침공은 불가했을 것이다. 최근 러시아, 중국 등 권위주의 독재국가들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민주 서방국가들간 갈등이 이어지는 소위 신냉전 질서가 도래했다. 이에 집단안전보장을 기치로 출범한 유엔은 안보리 상임이사국 중국과 러시아의 방해로 본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민주 가치를 공유하는 나토의 역할은 그만큼 더 커진 것이다. 나토는 유럽이나 북미에 머무르지 않고, 글로벌 파트너 국가들과의 협조를 확대하고 있다. 예를 들어 IP4로 불리는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인도·태평양 4개국은 2022년부터 초청되기 시작했고 그해부터 4개국 첫 회의도 개최되었다. 대한민국은 2022년 5월 아시아 최초로 나토 사이버 방위센터(CCDCOE) 정회원에 가입했는데, 나토 비회원국가로는 다섯 번째이며, 정회원 신규가입국 중 나토 회원국이 아닌 유일한 국가였다. 이는 글로벌 중추국가로서 자유와 국제평화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의 나토 정상회의 참석은 2022년 이후 3회 연속이다. 나토 사무총장은 윤 대통령 취임 후 3년 연속 정상회의 참석에 대해 우리의 깊어지고 강화된 파트너십을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했다. 나토와의 협력 강화는 우선, 대한민국의 안보 지평을 넓히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나토는 창설 직후 6.25 전쟁 당시 유엔군의 주력으로 참전하여 대한민국 자유와 평화를 지켰으며, 나토 국가들은 지금도 유엔사의 주요 멤버다. 유엔사는 한반도 유사 시 전력제공자 역할을 수행하기에 억제력을 한층 제고하게 된다.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와 협력은 한미동맹 강화로도 이어진다. 특히나 최근 러북간 동맹관계를 수립하고 불법 밀착을 강화하는 상황에서 강력 견제 메시지 발신 의미도 있다. 아울러 도움을 받아온 대한민국이 국제평화에 기여하는 기회가 된다. 나아가 K-방산 주요 구매국이 폴란드 등 나토 국가라는 점에서 경제효과 또한 기대할 수 있다. 2024.07.08 문성묵 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
- 일본 힙합 선구자에 영향을 준 ‘랩’이라는 보컬양식 최근 한국에서 일본 대중음악, 소위 제이팝의 인기가 올라가고 있다. 요즘 젊은 세대는 별다른 색안경 없이 제이팝을 흥미롭게 소비한다. 또한 일본 대중음악 중에서도 힙합의 약진은 인상적이다. 힙합은 일본에서 분명 또다른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고, 한국힙합과 일본힙합의 교류 역시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준비했다. 일본힙합의 역사 2부작이다. 지금이야 이야기가 다를 수 있지만 과거의 일본은 무엇이든 한국보다 5년에서 10년, 혹은 그 이상으로 빨랐다. 대중음악 역시 그랬고 힙합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일본힙합에 대해 논하려면 어쩌면 19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수도 있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그룹으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밴드 옐로우매직오케스트라의 Rap Phenomena(ラップ現象)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옐로우매직오케스트라가 힙합그룹이란 말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일본힙합의 역사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들의 노래 Rap Phenomena (ラップ現象)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 노래로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1981년에 이미 랩이라는 보컬양식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힙합의 주요 보컬양식인 랩에 대한 언급이 이미 1981년의 일본 대중음악에 등장했던 것이다. 사카모토 류이치(오른쪽)가 2018년 10월에 열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에 참석했다.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힙합의 선구자 중 한 명인 아프리카밤바타의 인터뷰 역시 빠뜨릴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당시 옐로우매직오케스트라의 엘피를 구입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그들의 음악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이것은 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힙합의 초창기를 대표한 선구자가 동시대에 일본의 밴드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 이것은 일본음악이 힙합의 초창기에 실시간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옐로우매직오케스트라 뿐만이 아니다. 한국에 랩이 도입된 시기를 대략 1990년대 초중반으로 본다면, 일본에서는 이미 1980년대에 힙합과 관련한 여러 움직임이 있었다. 디제이유타카는 아프리카밤바타가 창시한 힙합 단체 줄루네이션에 가입한 최초의 아시아인 멤버였고, 이토세이코가 1985년에 발표한 앨범 업계군이야기(業界くん物語)는 슬릭릭의 스토리텔링 기법에 영향을 받은 최초의 일본어 랩으로 평가 받는다. 또한 후지와라히로시와 타카기칸이 1987년에 결성한 그룹 타이니펑스와 그들의 레이블 메이저포스의 활동, 요요기 공원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비보잉의 물결과 크레이지A라는 인물의 존재, 최초의 힙합영화라고 불리는 1983년작 와일드스타일 출연진의 일본투어 등도 일본힙합의 초창기를 들여다볼 때 빼놓을 수 없는 사실들이다. 1980년대에 이미 미국힙합과 동시대에 교류하던 인상이라고 할까. 그리고 이것은 1980년대 당시의 일본의 지위를 말해주기도 한다. 1990년대에 들어서며 일본힙합은 본격적으로 씬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한국힙합이 홍대에 터를 잡고 씬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이 2000년대 이후이니 10년 정도 빨랐던 셈이다. 1980년대에 등장했던 이들이 일본힙합의 조상님이라면 1990년대의 시작과 함께 등장했던 이들이야말로 일본힙합 씬을 개척하고 기틀을 다진 형님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타이거JK, 엠씨메타 같은 존재라고 할까. 1990년대의 시작과 함께 등장했던 일본힙합 아티스트 중 가장 주목해야할 아티스트는 바로 지브라다. 지브라는 실력과 스타성을 모두 갖춘 래퍼였고 일본힙합 최초의 랩스타였다. 그리고 이 말은 곧 그가 아시아 최초의 랩스타였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일본힙합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시작하고 발전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브라는 힙합음악으로 일본 엔터 업계의 높은 위치까지 올라갔던 인물이다. 아무로나미에와 합작을 하거나 프로젝트 팀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일본에서 힙합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예능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출연하는 등 선구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것은 지브라와의 대화를 통해 직접 들은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힙합의 성공 및 대중화와 별개로 지브라가 일본힙합에 기여한 또 다른 업적이 있다. 바로 일본어 라임의 체계를 정립했다는 점이다. 지브라는 솔로아티스트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킹기도라라는 3인조 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킹기도라의 1995년작 하늘로부터의힘(空からの力)은 일본어 라임의 체계를 정립했다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이 작품 이전의 일본어 랩과, 이 작품 이후의 일본어 랩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다음은 킹기도라의 또 다른 멤버인 래퍼 케이덥샤인의 말이다. 시부야에서 그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어의 어미에서 문장의 마지막에 아-라든지 와-라든지 길게 늘어뜨리는 것이 그 전까지는 주류였습니다. 그런데 그걸 단어로 대체하는 것에 주력했어요. 일본어 문법에서 말하는 타이겐도메라고 마지막 구를 체언으로 맺는 표현이 있는데, 뉴스 등에서 마지막에 입니다, 일 것 같다로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지명으로 끝내거나 단어로 끝내는 것 같은 표현법 말이죠. 그리고 일본어 문법 중에 도치법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 것을 최대한 많이 사용해서, 단어로 라임을 만드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킹기도라의 1995년작 하늘로부터의힘(空からの力)은 버벌진트의 2001년작 Modern Rhymes EP와 비슷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일본어 랩을 정립했고 후자는 한국어 랩을 정립했으니 말이다. 이야기는 2부에서 이어진다. ◆ 김봉현 음악저널리스트/작가힙합에 관해 책을 쓰고 강의를 하고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케이팝 아이돌 연습생들에게 음악과 예술에 대해 가르치고 있고, 최근에는 제이팝 아티스트들과 교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힙합 에볼루션, 힙합의 시학 등이 있다. murdamuzik@naver.com 2024.07.05 김봉현 음악저널리스트·작가